스페인 회화에는 보데곤(bodegón)이라는 장르가 있다. 선술집 ‘보데가’에서 나온 말로 음식, 정물화로 번역된다. 그러나 주로 서민층 인물이 곁들여지기도 하므로 장르화, 즉 민속화에 가깝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의 초기 작품 <세비야의 물장수>가 그런 그림이다. 그림은 북부 이탈리아 플랑드르 화풍에 바탕을 두어 매우 사실적이다. 물장수의 주름진 얼굴도 그렇지만, 무화과가 든 유리잔과 항아리의 대조적인 질감과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전면 항아리에 맺힌 물방울은 대한민국 ‘물방울 화가’ 김창렬의 그림이 연상된다. 그리고 물장수는 당시 세비야의 서민 사회에 실존했던 인물상이다. 그가 아이와 함께 크리스털 유리잔을 손으로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장군 간 중요한 협정을 맺는 의식처럼 진지하다.
작품이 완성된 1618년 4월 23일 벨라스케스는 스승의 딸 후안나 파첸코와 결혼했다.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5년간 세비야 화풍을 가르치면서 제자의 남다른 재능을 흐뭇하게 여기고 있었다. 인심 좋은 그는 알라메다 광장 입구에 있는 330다카트 상당의 집과 갈레고스 거리에 있는 집을 지참금으로 내놓았다. 잘생긴 신랑을 얻게 된 후아나도 기뻐하는 눈치였다. 약 1700다카트 상당의 혼수를 마련했다. 이듬해 5월 첫딸 프란시스카를 얻어 그들이 결혼했던 산미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파체코는 35년간 심혈을 기울인 <회화예술(1649)>이란 책에서 제자의 자질과 그림 그리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벨라스케스가 소작농을 조수로 고용해서 울고 웃는 모든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어떤 어려운 자세도 막힘없이 그려냈다고 전한다.
“내가 내 학생을 나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리라. 라파엘로를 제자로 두었다고 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해가 될 리 없고, 티치아노를 제자로 둔 것이 조르조 카스텔프란코에게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16세기 말 스페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귀환으로 대서양 횡단 무역의 독점권을 가진 도시였다. 유대인 출신 변호사로 인두세를 면제받는 소귀족이었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비아(벨라스케스는 어머니 헤로니마 벨라스케스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자닌 바티클의 <벨라스케스> 참조)는 아들의 스승으로 파체코를 선택했다. 벨라스케스는 스승의 문화적 소양과 함께 카라바조의 화풍과 자연주의적 경향에 과감하게 눈을 돌릴 줄 알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존경심을 유지했던 인물이 바로 티치아노이다. 그러나 그를 모방하여 말끔하고 세련된 그림이 아니라, 투박하고 과장된 필치를 즐겨 사용했다. 이를 이상히 여겨 묻는 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세련된 그림에서 2등이 되고 싶지 않다. 투박한 그림에서 1등이 되고 싶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영웅(1651)>)
이 그림 <세비야의 물장수>는 벨라스케스가 출세하는 데 있어서 디딤돌 역할을 했다. 1923년 당시 왕의 의전관이던 후안 데 폰세카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폰세카는 당시 실력자인 총리 돈 가스파르 데 구스만, 즉 올리바레스 백작을 소개해줬다. 그는 벨라스케스와 같은 세비야 출신으로, 1621년부터 열여섯 살 펠리페 4세를 대신해 스페인을 다스린 인물이다.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추방된 유대인의 입국과 거주를 허용하고 종교재판소의 개입을 배제하자는 주장이 독특했다. 하지만 개혁에 실패했고 스페인은 결국, 파산한다. 여하튼 스물세 살의 벨라스케스는 올리바레스 백작 덕분에 1623년 8월 30일 펠리페 4세(재위 1621~1665)를 처음으로 알현했다. 그리고 6주 후 궁정화가가 되었다.
당시 궁중 화가는 벨라스케스 말고 6명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쉰 살이 넘는 화가여서 젊은 왕과는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수도사이면서 왕과 가족들의 모습을 매끈하게 담아내던 바우티스타 마이노 정도가 왕의 곁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력이 남달리 출중하면서도 몰락 직전까지 헌신했던 벨라스케스에게 국왕은 20다카트의 같은 월급을 주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펠리페는 깊은 애정을 갖고 그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맡겼다. 합스부르크 가문인 그는 펠리페 3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 무기력했던 선왕 때와는 달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획기적인 개혁정책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라기보다 탐미주의자였다. 네덜란드와 소모적인 전쟁을 재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를 침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