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 최초의 풍경화 <톨레도의 풍경>은 터너와 모네,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하늘’이 유명한 작품이다. 분위기가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동산>과 닮았다. 3단 제단화 오른편 윗부분 ‘유황불로 덮인 지옥의 풍경’처럼 섬뜩하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 음울함으로, 모두 빛의 마법이자 경고이다. 번개 치는 하늘과 검은 뭉게구름의 변화가 매우 불안정하다. 그리고 알카사르(성, 14~15세기에 만들어진 스페인 건축물)와 성벽, 성당의 종탑 등 금속 같은 시설물이 번개 빛을 토해내고, 언덕 풍경을 이룬 초록색은 더욱더 짙어진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유령이 사는 도시처럼 보인다.
작품의 형태와 색채가 예사롭지 않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시각 장애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작품 속 흔들리는 듯한 대상, 극단을 오르내리는 명암법, 그리고 거친 붓놀림을 보면, 일면 그 평가가 타당성을 지닌다. 실제 엘 그레코는 늘 방 안에 커튼을 치고 어둠 속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동시대 또 다른 마니에리스모 대표 화가인 파르미자니노는 우울증, 폰토르모는 대인기피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모두 일반인의 내면보다 갈등이 치열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가장 높은 곳에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톨레도 대성당을 알카사르 궁 옆으로 끌어왔다. 세속의 힘과 정신적 권위를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알칸타라 강, 산 세르반도 성을 포함하여 도시의 동쪽 부분만 그렸는데, 그것도 매우 자의적이다. 무엇보다 언덕의 경사를 강조했으며, 육중한 방호벽을 생략하고 실제로는 왼쪽으로 흘러야 하는 강의 바닥을 전면에 배치했다. 타구스강 계곡에서 바라본 눈높이에서는 실제 교회의 종탑이 보이지 않는다. 성 바로 옆에 붙어 있지도 않다. 돈후안타베라 병원의 크기를 줄여서 그렇다. 병원이 비사그라의 정문을 가릴 뿐 아니라, 돔이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너무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지적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 건물의 실제 위치는 지도에서나 확인하라.”
작품은 그의 후기작으로,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순수 풍경화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교리를 벗어나 풍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척박한 예술 환경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 톨레도와 그의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하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엘 그레코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살았던 세르반테스가 “바윗덩어리, 에스파냐의 영광, 에스파냐 도시의 등불인 톨레도여!”라는 표현과 서로 맥이 통한다. 엘 그레코, 그는 당시 에스파냐에서 두드러졌던 반종교개혁의 열망을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바로크 미술을 선도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회화계의 이단아였다.
참고로 1516년 이사벨 여왕은 톨레도의 경치에 반해 주변 경관에 변화를 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이 무너질 경우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지으라고 했다. 이후 펠리페 2세 때인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다. 톨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 바야돌리드 등 왕가와 유대가 깊었던 도시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에서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1570년부터 미로처럼 얽혀 있는 중세 도로를 재정비했다. 중앙광장인 플라사 데 소코도베르를 다시 설계했고, 낡은 수도관을 교체해서 알카사르로 맑은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 그림과 함께 말년에 그린 <톨레도 전경과 지도>는 도시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새로운 이미지를 알리기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톨레도 역사와 지도에 관해 평생 연구한 살라사르 데 멘도사의 의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병원 행정 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작품 전경 구름 위에 서 있다. 결과적으로 수도를 다시 이곳으로 옮겨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그곳 경치가 예전과 큰 틀에서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곳엔 톨레도를 끝까지 지켰던 엘 그레코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