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 두 점의 초상화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 궁정에서 화가로서 그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연을 만났다. 루벤스는 1628년 9월 초순부터 1629년 4월까지 약 8개월간 외교관으로 가톨릭의 펠리페 4세와 개신교인 영국 찰스 1세의 관계 개선을 위해 체류했다. 사실상 멘토 역할을 한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예술에 대한 열망을 가득 찬 벨라스케스에게 더 큰 세계, 이탈리아를 이야기했다. 루벤스 역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탈리아에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던 아쉬움을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결심했고, 1629년 6월 26일 여행을 허가받았다. 휴가를 내고 떠나야 했던 이때의 여행에 동행했던 인물이 훗날 <브레다의 항복(1635)>의 주인공 스피놀라 장군이다. 8월 23일 제노바에서 짐을 풀었고, 베네치아에서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을 모사했다. 그리고 1631년 초 마드리드로 돌아올 때까지 1년간 로마에 머무르면서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라파엘로 작품을 모사했다. 아쉬운 점은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단계 발전시킨 이때의 유용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즈음 작품으로 <불카누스의 대장간>, <요셉의 겉옷>, <로마 메디치 빌라의 정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방문이 몹시 흥미롭다. 30년 전쟁의 막바지에 스페인의 재정이 매우 열악할 때 추진했다. 1647년 5월 18일 벨라스케스가 올린 청원을 보면, 1628년부터 1640년까지 수당 3만 4천 레알(3000다카트)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행히 펠리페 4세의 배려로 알카사르 궁 내부 장식을 위한 고대 유물의 복제품과 회화 작품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미술관 큐레이터의 선조인 셈이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649년 베네치아에 도착하여 2년을 이탈리아반도에서 머물렀다. 이때 그는 로마에서 작품 단 두 점의 초상화만을 남겼다.
얼굴이 검다. 최초의 아프리카계 스페인인(무어계 세비야 사람) <후안 데 파레하>이다. 당시 벨라스케스의 능력은 20년 전 첫 번째 방문 때하고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리라 예감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이 작품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작품을 보면, 함께 간 파레야도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벨라스케스는 두 가지 색조만으로 파레야의 피부색에 조화를 주었고 하얀 레이스 칼라와 벨벳 소매, 그리고 양털 상의의 풍부한 질감을 잘 드러냈다. 파레하는 벨라스케스의 노예 신분이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아래를 내려 보는 그의 자세는 단순히 노예로만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다. 당시 레이스 칼라는 노예에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짙은 색상의 띠를 사선으로 둘러 매우 도전적이다.
<후안 데 파레하>가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벨라스케스의 지위와 두 사람의 인간관계가 작용했다. 이때의 벨라스케스는 단순한 궁정화가가 아니었다. 1643년 추밀원 부관으로 임명된 지체 높은 귀족이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노예를 두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노예 신분으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는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벨라스케스도 파레하에게 허드레 일만 시켰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주변의 요청으로 파레하는 1654년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후에도 벨라스케스가 죽을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의 배려에 보답했다.
1650년 3월 19일 판테온 부속 수도원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후안 데 파레하>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벨라스케스 전기를 쓴 안토니오 팔로미노에 의하면, “다른 그림들이 단순한 ‘예술’이라면, 이것 하나만이 ‘진실’이라는 평을 받았다”라고 한다. 지금 이 그림, ‘북아프리카 사내의 초상화’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렸다. 1970년 당시 1만 파운드가 넘는 가격에 팔린 최초의 그림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미술관 최고의 작품으로 대접받는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린 또 다른 작품 하나가 바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이다. 벨라스케스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76세의 교황이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다. 교황의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팜플리이다. 추기경 시절인 1626년 5월부터 1630년 5월까지 교황 대사 자격으로 마드리드에 머문 바 있었다. 이때 맺은 스페인 궁정과의 인연이 작용하여 72세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을 잘 알고 있었던 벨라스케스는 베니스풍(특히 티치아노)으로 거침없이 붓질했다. 붉은색을 주 안료로 하면서도 색채 간 대비를 통해 공식 법의의 화려함과 위엄을 분명히 드러냈다. 교황의 예리한 눈빛, 꽉 다문 입술, 찌푸린 미간은 강인함과 동시에 외교와 친척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교황 자신이 당황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얼룩진 물감 범벅으로 보인다. 약간 거리를 두고 보아야 기적처럼 형체가 나타난다. 빛의 반사 작용을 계산한 벨라스케스의 붓놀림 솜씨이다. 훗날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와 20세기 화가 베이컨이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이컨은 말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 중 하나다."
벨라스케스의 국왕을 대함에 있어 신중한 태도가 한결같았다. 그러나 그가 지상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교황에게 주눅 들지 않고 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왕의 총애가 있었다. 이런 배경을 알면, 관음증을 극대화한 <거울 앞의 비너스(제목 그림)>의 탄생 과정이 이해된다. 당시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스페인에서 누드는 화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였다. 그는 교묘한 수단을 동원했다. 비너스의 아들 큐피드가 화살 대신 거울을 들고 있다. 그녀는 뒷모습만 보여주면서 거울에 비친 표정을 통해 보는 이의 관음증을 끌어냈다. 작품은 알카사르 궁 남쪽의 호화스러운 방이 아니라, 펠리페가 궁을 빠져나와 조용히 머물던 궁 북쪽에 걸렸다. 마침 1734년 대(大) 화재에서 작품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1865년 프라도 박물관에서 이 작품으로 인해 마네가 벨라스케스의 숭배자가 되었으며, 피카소는 말년에 이 그림을 모티브로 40여 편의 습작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미학적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1914년 3월 10일 매리 리처드슨이란 여인이 이 작품에 난도질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 팽크허스트의 구속되자 "비너스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살아 있는 훌륭한 현대 역사의 지도자"라고 항의하면서 저지른 행동이었다. 6개월 복역을 하고, 그림도 복원된 지 한참 지난 1952년 '왜 하필 이 그림이냐?'는 질문에 리처드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를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남자들이 날마다 줄을 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