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대의 걸작 <시녀들>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1985년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에서 가장 위대한 미술 작품으로 뽑혔다. 작품명은 <시종과 난쟁이가 함께 있는 공주 전하>에서 <펠리페 4세의 가족>으로 불리다가, 혁명의 시대인 1840년대에 이르러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같은 그림이라도 시대에 따라 시선을 달리하나 보다.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을 궁정화가 지위에 올려놓아 준 펠리페 4세의 가족 초상화의 형식으로 제작했다. 그런데 작품의 주인공이 모호하다.
국왕 펠리페와 왕비(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가 알카사르 성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제 막 도착했다. 왕비의 시종 호세 니에토가 국왕 부부가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출입문을 열어 놓았다. 시녀 이자벨 데 베라스코가 당황한 듯 일어서서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구부려 공손히 인사한다. 그러나 화가의 캔버스 뒷면이 보이는 까닭에 마치 그녀가 작품 감상자를 향해 인사하는 듯하다. 왕의 방문은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그만 거울 속 국왕 부처, ‘존재하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혼란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국왕 부부가 주인공이 아닌 듯하다.
그럼, 그 의도가 무엇일까? <18세기 스페인 미술가 평전>을 저술한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의 견해를 빌리면, 국왕의 방문은 그 자체로 화가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화폭이 아니라 거울에 이미지로 담은 것은 일종의 암시로, 예의를 갖춘 신중한 자세라고 평했다. 화실은 왕이 배려해 주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던 왕이 거의 매일 벨라스케스를 보러 와서 조용히 작업을 감상하곤 했으니(스승이자 장인인 파체코의 기술) 두 사람은 단순한 고용 관계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일시적 방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벨라스케스가 국왕 부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러나 국왕 부부를 전면에 배치하면,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주제가 흔들린다. 그렇다고 시녀들과 나란히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거울을 이용한 화가의 트릭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거울'이라는 주장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에서 드러낸 오류를 비판없이 받아들인 결과라는 문제 제기가 존재한다. 거울이라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국왕 부부의 모습만 온전히 담긴 것으로 보아 '초상화'라는 주장이 나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회화가 과학이 아니라 창작의 영역인만큼 거울로 보아도 탓할 일은 아니다)
단순히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면 중앙에 있는 다섯 살배기 마르가리타 공주처럼 보인다. 공주는 본처와 아이들이 모두 죽었을 때 펠리페 4세의 곁에 있는 유일한 혈육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한 사이였으나 황후가 된 후 스물한 살에 요절했다. 공주는 루이 14세와 1660년 결혼한 마리아 테레사의 이복동생이다. 참고로 마리아 테레사의 또 다른 이복동생이 스페인-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인데,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오해에서 붙여졌지만, <시녀들>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무리가 없다. 공주의 시종 중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왼편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트와 달리 오른편에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난쟁이 광대 마리 바르볼라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일명 크레틴병이라고 하는 선천성 갑상선 기능저하증(뇌수종이라는 의견도 있음)으로 인해 몸이 왜곡되었다. 그녀 좌측에서 발로 개를 건드리는 소년 니콜라스 데 페르투사도 신체 비율만 정상일 뿐, 역시 난쟁이다. '뇌하수체 기능부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왕의 등장에도 그들의 태도는 자유롭다. 특권이 아니라 애완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궁전에서 여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벨라스케스가 작품 속에 개를 배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우스꽝스럽게 그리지 않았다.그들의 개인 특성을 밀도 있게 담아냄으로써 그가 신분이 낮은 이에게도 공정한 관심을 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작품은 두 그림이 합쳐졌다. X선 촬영을 통해 본 첫 번째 버전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없었다. 거울은 그대로이나, 그림 중앙에 한 청년이 어린 공주에게 지휘봉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니엘 아라스, <서양미술사의 재발견>) 그렇다면, 주인공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오리무중에 빠진다.
반면 작품은 벨라스케스가 당시 차지하고 있던 위치와 함께 많은 사람이 가졌던 관심과 논란을 정리해준다. 그는 붓을 들고 그림 왼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스페인 최고의 명예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 문양이 뚜렷하다. 그가 생애 마지막 10년간 노력을 기울여 얻으려 했던 작위다. 마침내 그의 소망이 이루어져 1659년 산티아고 기사회에서 작위를 받았다. 정면을 향한 그의 자세에서 자신감이 묻어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엘 그레코 이후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화가는 아직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벨라스케스가 <시녀들>에서 자신의 노골적인 갈망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작품은 작위를 받기 이전에 완성했다. 3년 후 문양을 덧칠한 것이다. 화가 팔로미노에 따르면, 펠리페 4세가 작품 속 화가 모습에 산티아고 기사회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벨라스케스에 이르러 화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점은 분명하다. 작품은 스페인 회화에 새로운 사실주의적 감각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 그 주인공을 가리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냥 보는 이의 마음 가는 대로 정하면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