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로서 최고 지위에 올랐을 때 고야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벨라스케스처럼 이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칠 기회를 맞이했다고. 그러나 당시 스페인의 정치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1년 오렌지 전쟁을 통해 영국과 동맹을 이룬 포르투갈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프랑스로부터 동맹을 강요당한 스페인은 매달 600만 프랑과 함께 포르투갈의 중립을 감시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게 스페인의 중립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영국은 페루의 보화를 실은 스페인 선단을 공격했고 양국 간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게 패하자 1806년 대륙 봉쇄령으로 맞섰다. 하지만 대영 무역 의존도가 절반이 넘는 포르투갈이 영국 함선들에 테주강 하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프랑스와 포르투갈-영국이 한 편이 되어 반도 전쟁(1808~1814)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 프랑스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1807년 10월 스페인이 국경을 열어주자 피레네 산맥을 통과한 앙도슈 쥐노 장군과 2만 7천 명의 군대가 11월 27일 리스본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뒤퐁 장군의 4만 병력이 동맹국 스페인으로 진입했다.
여기엔 혼란스러운 스페인 정국이 한몫했다. 카를로스 4세가 정치에 무관심한 사이, 마누엘 데 고도이가 페르난도 왕세자와 갈등을 일으켰다. 1808년 3월 17일 소위 ‘아랑후에스 폭동’을 계기로 페르난도 7세가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고도이의 부패와 폭정에 불만이 쌓인 민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 해안은 영국과 밀무역의 천국이 되었고 지방관은 이를 묵인했다. 프랑스에 내정 간섭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고도이의 요청으로 스페인으로 들어온 나폴레옹 군대는 동시에 페르난도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왕위를 다시 아버지 카를로스에게 되돌려주었고, 다시 모든 권력은 나폴레옹에게 이양되었다. 카를로스와 마리아 루이사는 이탈리아로, 페르난도는 이후 6년간 프랑스의 한 성에 머물러야 했다.
무난할 것 같았던 프랑스의 권력 장악은 그해 5월 2일 나머지 왕실 식구들을 국경 근처 비욘으로 이동시키려 했을 때 사달이 났다. 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불꽃처럼 번지면서 성난 마드리드 시민들은 프랑스 주둔군을 공격했다. 프랑스 군은 살육을 통해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6월 6일 보나파르트 형 조제프(호세 1세)를 왕위에 앉혔다. 이로써 반도 전쟁은 스페인 독립전쟁으로 바뀌었다. 1813년 6월 21일, 빅토리아 전투에서 영국 웰링톤 공작이 조제프를 물리치면서 마침내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스페인의 저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용기를 북돋웠고,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로 나폴레옹은 결국,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스페인에 자유주의를 선언한 임시 정부가 있었음에도 페르난도의 절대군주 체제로 회귀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중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필리핀을 제외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모두 잃고 제국의 면모를 상실했다.
고야는 프랑스를 통해 혁명의 이상과 조국의 근대화를 소망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직업 화가였던 그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프랑스 <니콜라스 기 장군(1810)>과 함께 전후에는 영국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1813~1814)>를 그렸다. 따라서 만만치 않은 정국에서 작품만 가지고 그를 기회주의자로 모는 것은 지나치다. 그는 전쟁을 통해 프랑스 군의 야만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호세 1세의 수석 궁정 화가였던 고야는 전쟁이 끝난 후 반역자라는 비판을 받고 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려 당시의 참화를 증언하면서 마음의 빚을 덜려했다. <1808년 5월 2일(1808~1814)>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려 당시의 참화를 증언하면서 마음의 빚을 덜려 했다. 하지만 <1808년 5월 2일>은 상대적으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페르난도 7세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1808년 5월 3일>이 고야의 철학과 화풍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회자된다.
그날 낮에 총성이 울렸고, 43명이 반란자라는 죄명으로 죽었다. 하루 전 나폴레옹 친위대에 저항하여 대규모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고야는 조명등만 비추는 밤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흰옷을 입은 사내가 공포에 떨고 있는 동료를 막아선 채 나를 쏘라는 듯 두 팔을 벌린다. 하지만 무릎 꿇은 모습임에도 그의 덩치가 지나치게 크다. 십자가에 못 박힌 희생의 그리스도 역할이기에 그렇다. 총구를 눈 앞까지 들이댄 맞은편 프랑스 병사들에겐 자존심이 없다. 기계적인 익명성이 강조되었다. 이 구도는 에두아르 마네가 <막시밀리안의 처형(1868)>에서,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1951)>에서 차용했다. 그리고 시인 보들레르는 고야를 가리켜 '진실 속에 숨겨진 잔인함'을 표출한 화가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좀 더 일찍 스페인 민중과 아픔을 함께 했야 했다. 6년이나 지난 1814년, 프랑스군이 모두 물러간 이후 작가 본인이 제의하여 의회가 주문하는 형식으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간 전쟁 기간 중 내내 직접 목도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렸다. 그의 나이 예순여덟 살이 되던 해로, 이후 더는 평화로운 풍경화나 풍속화에 손대지 않았다.
그의 침잠에는 고도이가 고야에게 개인적으로 주문한 <옷 벗은 마야>가 일단의 역할을 했다.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신화 속 여신이 아니라 실제 여인의 누드를 담았기에 ‘신성 모독’이라는 논란이 일어났다. 더 큰 문제는 여성의 체모가 표현된 최초의 유화라는 데 있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1866)>과 에곤 실레의 누드에 와서야 여성 체모에서도 솔직해지는데,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결국, 고야는 압력에 굴복하여 <옷 입은 마하>를 그렸다. 머리와 몸이 부자연스럽게 연결되었으나 드레스 끝단 아래 드러난 가냘픈 발, 하복부의 뚜렷한 삼각지대 등 관능미는 여전하다.
고도이는 방문자 중 선별된 인원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옷을 벗은 마야>는 <옷을 입은 마야>에 가려져 있었다. 1808년,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고도이가 종교재판에 부쳐지자, 고야도 함께 불려 나갔다. 그는 티치아노의 <다나에>와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화장>을 따라 그렸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그림은 1813년에 압수당했다. 고야로선 이단을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반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마녀사냥식 종교재판이 성행했었다.
여기서 잠깐, <평화 대공(大公) 마누엘 고도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실각했다가 재상으로 복귀한 그가 스페인군 총사령관으로 ‘(對 포르투갈) 오렌지 전쟁’을 지휘할 때 모습이다. ‘평화 대공’이란 1793년 선전 포고한 프랑스 국민공회와 1795년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붙은 별칭이다. 전쟁은 승리했지만, 배가 꽉 낄 정도로 뚱뚱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고도이의 자아도취를 조롱하는 듯하다.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의 부인 <찬촌 여백작의 초상>을 비교해 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고도이와 그녀의 결혼은 뜻밖에도 연적인 왕비 마리아 루이사에 의해 성사되었다. 궁전에서 쫓겨나 있던 돈 루이스 디 부르봉의 딸 마리아 테레사를 선택했다. 고도이를 왕족으로 끌어들이려는 왕비가 즉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으면서, 고도이의 여성 편력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 1797년, 둘은 결혼하여 딸도 갖고 금실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잘 모르고 하는 말일 게다. 남편과 왕비 사이에서 그녀의 속은 문드러졌으리라. 고야는 이 불행한 여인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다. 모자에 모성애와 다산을 상징하는 밀 이삭으로 꾸몄다. 그녀가 딸 카를롯타를 임신한 지 5개월 되던 때였다. 진줏빛 부드러운 색과 적절한 스푸마토 기법으로 감쌌다. 그러나 불안한 눈빛과 함께 우아함이 오히려 안쓰럽다. 스페인 근대사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