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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25. 2022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 푸생

그리고 풍경화의 거장 클로드 로랭

인류는 편의를 위해 습관적으로 분류를 한다. 그리고 그 분류에 사물과 현상을 꿰맞추려 한다. 화가의 분류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이 분류에 의해 화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그것에 지나치게 천착하다 보면, 오히려 편견을 불러온다. 따라서 분류란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의 작품 세계와 관련하여 심지어 르네상스 화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베르너 융, <이학사 입문>)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1637~1638)>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의해 전해진 로마 초기의 전설로, "로마는 언제나 로마에 정복당한 이들과 결합하고 뒤섞였다"는 문명의 혼종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제작 연대가 정확하지 않고, 버전은 두 가지다.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 로물루스는 초기 로마의 인구, 특히 여성들이 절대 부족했던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건국 나흘째 되던 날, 그는 이웃 사비니(Sabini) 사람들을 초대했다. 작품은 바다의 신 넵투누스 신전을 발견했다며(혹은 곡물의 신 콘수스를 위한) 성대한 축제를 연 후 그곳에 모인 사비니 여성들을 납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테베레강 동부 산악지대에 살던 사비니족은 스파르타에서 이주해 온 전사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다. 결국, 두 부족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붉은 망토를 걸친 로물루스가 아수라장이 된 납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아니 지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거친 로마 남자들은 저항하는 사비니 여자들을 안거나 허리에 꿰차고 끌고 간다.

푸생은 이런 '군중들의 역동적인 형식'을 좋아했다. 바로크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주의적 기법이 가미되어 있다. 그래서 납치라는 폭력적 배경과는 달리 전체적인 분위기가 균형이 잡혔다. 그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했다. 준비 단계에서 밑그림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과 미학을 프랑스 미술에 접목하여 이탈리아의 선진 미술과 간극을 좁혔다.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629)>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 나바라 왕국의 무관이었다. 혼란한 정국을 피해 프랑스 센 강 하류에 있는 레 잔드리로 이주했을 때 푸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열여덟 살에 부모 몰래 가출하여 파리에 도착했고 그곳 왕실 소장 라파엘로의 복제 판화를 보고 로마 여행의 꿈을 키웠다. 마침내 서른 살이 되는 1624년,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엄청난 독서량을 보였다. 회화뿐이 아니라 역사, 철학은 물론 소설류까지 광범위하게 섭렵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당)을 위한 제단화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를 주문받고 난 후 외국인임에도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그는 카라바조 풍(風)의 강렬함과 소란스러움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라치의 구성에 친근함을 느껴 볼로냐 모임에 가입했고, 역동성이라는 협의의 바로크에서 벗어나 아카데미적 고전주의 미술을 지향했다. 그러나 라파엘로와 카라치 형제의 미술을 받아들이되, 역사주의와 영웅주의를 조화시키려 했다. 그 결과,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문학적 판타지까지 담긴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 파리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던 이탈리아 시인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영향이 컸다.


푸생은 선택된 주제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그중에서 가장 알찬 내용과 효과적인 장면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장면에 자신의 미학적 신념에 근거하여 인물들의 심리적 움직임을 포즈, 몸짓, 표정 등으로 나타냈다. 여기에 조명의 효과까지 포함하여 작품 전체를 구상했다. 그래서 베르니니가 푸생을 두고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했다. (이일, <푸생>) 선도적인 예술 이론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의 철학과 예술 이념을 구현한 푸생은 17세기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전범(典範)이었다. <미술비평사(1935)>를 쓴 이탈리아 미술 사학가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는 이렇게 단언한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체계를 완성하고 벨로리의 관념을 구체화한 미술가는 철학적 화가인 푸생이었다.”


프랑스 화가 가운데 그를 '가장 이탈리아적'이라고 평가한다. 1640년 루이 13세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수석 궁정화가를 지낸 2년을 제외하고는 남은 생애 전부를 로마에서 보냈다. 파리에서 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혼자 작품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완성이 늦었다. 게다가 자신의 차분한 화풍이 호응을 얻지 못하던 차제 프랑스 화가들의 질시가 뒤따랐다. 그중에는 국왕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의 총애를 받는 시몽 부에가 있었다. 푸생은 아내를 데려오겠다는 구실로 파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비주류였던 그의 작품 세계는 사후 프랑스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바로크 미술의 두 거장 작품을 둘러싸고 ‘예술적 가치’ 논쟁이 벌어졌다.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로제 드 필(Roger´de Piles)이 불을 지폈다. 푸생이 지나치게 고전주의에 경사되었다며 루벤스를 치켜세웠다. 이로써 화단에는 루벤스의 색채와 푸생의 선(혹은 빛)이 대립각을 형성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색채의 반란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간 색채는 대상의 형태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쟁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 베네치아, 19세기 신고전주의 앵그르와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사이에도 벌어졌다. 지금의 처지에서 보면, 모두 소모적인 다툼일 수 있으나 당시에는 자존심의 대립이었다. 

푸생의 가까운 동료이자 ‘프랑스의 바사리’로 평가받는 앙드레 펠리비앙(André Félibien)은 소묘의 손을 들어준다. 회화의 요소에서 소묘와 색채 모두 저급한 부분에 속하지만, 색채가 더욱더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소묘는 역사나 우화, 또는 표정을 재현하지만, 색채는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 근거이다. 그러면서 회화의 진수가 상상의 표현에 있으며, 특히 인간의 형상은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작품이기에 인간들의 대사건을 그리는 화가가 가장 탁월한 자라 여겼다. (이광래, <미술 철학사>) 이런 생각은 결국, 프랑스 아카데미가 각 장르 간 위계질서를 세우는 계기로 작동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푸생의 의지와 아무 관련이 없는 논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파엘로의 구성과 데생, 티치아노의 현란한 색채 감각을 동시에 몸에 지닌 화가이다. 자유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밝히면서도,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친절한 품성을 지녔다. 오히려 고전주의적 세계가 그 정신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한낱 형식의 아카데미즘을 낳을 뿐이라고 여겼던 인물이다.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1651)>

말년에 그는 배경으로 취급되던 풍경화에 역사와 함께 자신의 정신세계를 반영했다. 미술사에서는 그의 풍경화를 ‘영웅적 풍경화’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와는 대조적으로 신화나 성서의 유명한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있는 풍경>이다. 바로크 시대에 '화가의 성경'이라고 불린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속한 내용이다. (토마스 R. 호프만, <바로크>) 피라무스는 사랑하는 티스베가 암사자에게 잡아먹혔다고 추측하고 칼로 자결한다. 뒤늦게 죽어가는 애인을 발견한 그녀 역시 자결한다는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푸생은 이 절규를 천둥과 번개로 형상화했다. 그러자 그림 속 주인공들이 마치 이 격정적인 자연현상의 조연으로 보인다.


<이집트로의 피난(1647)>

바로크 시대 프랑스인으로 풍경화의 거장 대접을 받는 인물이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이다. 그는 로마에서 같은 프랑스인인 푸생과 가깝게 지냈다. 17세기 초반 로마는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많은 화가가 서로 교류하던 장소였다. 풍경화를 새로운 양식으로 정착한 네덜란드 미술가들이 이탈리아로 여행 혹은 이주하면서 생긴 변화이다. 두 사람은 종종 로마 근교의 캄파냐로 나갔다. 로랭도 성서나 신화를 모티브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러나 푸생과는 달리 그의 그림은 논리보다 서정적이다. 그리고 밫의 반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이집트로의 피난>에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요셉 등 성가족을 담았다. 캔버스 2/5 지점에 수평선을 잡아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 위로 태양의 따뜻한 빛은 아침 안개와 뭉게구름 속으로 스며들고, 강물 위를 반사한다. 광학 이론을 반영한 흔적이며, 광택이 나는 채색기법으로 완성했다. 얇고 반투명한 물감층을 여러 겹으로 쌓아 표면을 구성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이다. (차홍규·김성진, <서양 미술 100>) 명성을 얻은 그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와 로마의 경계를 넘어 스페인 펠리페 4세가 후원했다. 그의 독창성은 영국 낭만주의 화가 터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지만, 푸생과 함께 17세기 프랑스 회화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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