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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27. 2022

루벤스의 뤽상부르 궁전 연작

<리옹에서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만남(1622~1625)>

푸생이 등장하기 전 프랑스 내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에는 의외로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의 작품이 있다. 그의 연작 중 <리옹에서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만남>을 통해 그 배경의 일단을 들여다보자. 작품에는 제목과 달리 제우스 신과 그의 아내 헤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결혼의 신’ 히멘이 둘을 하나로 맺어주고, 속 모르는 두 마리 공작과 무지개가 이들의 결합을 축하한다. 혼란스럽다.

그 시작은 이렇다. 프랑스 루이 13세의 모후 마리 드 메디치는 새로 지은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자신과 죽은 남편 앙리 4세의 생애를 기리는 연작을 남기려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회화는 퐁텐블로 파(派)의 이탈리아식 기교주의가 고갈되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최고의 외국인 화가, 플랑드르의 루벤스를 불러와야 했다.

 

작품의 규모가 상당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과제였다. 일차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정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Ferdinando) 1세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면서 그 정지작업으로 조카 마리 데 메디치를 프랑스 부르봉 왕가로 시집보냈다. 그녀는 선왕이자 형인 프란체스코의 둘째 딸로, 메디치 가문으로서는 두 번째 프랑스 왕권과의 결혼이었다. 사실상 친 프랑스 노선을 택한 페르디난도는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로테스탄트인 앙리가 에스파냐 등 가톨릭 세력과 싸울 때 막대한 전비를 대줬으며 그를 대신하여 교황 클레멘스 8세와 협상, 1593년 앙리의 개종과 즉위를 끌어냈다. 앙리는 일생을 통해 두 번 프로테스탄트가 되고, 두 번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게다가 마리에겐 피렌체 은행가들의 재산에서 퍼온 역대 최고 액수의 지참금(60만 에퀴)이 있었다. 앙리로서도 혼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발루아의 마르그리트와 합의 이혼한 앙리에겐 두 번째 결혼이었다. 1600년 10월 결혼식에 대리인을 참석시킨 앙리는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마리와 리옹에서 어색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마리는 성품이 무난했으나 재치와 지성은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앙리는 첫아들 세자르 드 부르봉(훗날 방돔 공작)을 낳은 정부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사랑했다. 그래서 마르그리트와 이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1599년 4월에 가브리엘은 아이를 사산하고 그다음 날에 숨을 거두었다. 이래저래 앙리와 마리 두 사람 사이에는 애틋한 감정이 고이지 않았으며, 불화가 잦았다. 

그러다 1610년 5월 14일 앙리의 마차가 페롱네리 거리를 통과할 때 한 정신병자가 휘두른 칼에 대동맥이 찔려 죽었다. 그는 당시 ‘낭트 칙령’을 발표하면서 신·구교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스캔들이 있던 그녀가 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67년 전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 2세와 결혼했던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경우와 흡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카테리나는 왕이 될 시아주버니를 죽였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인내로 위기를 이겨냈다. 반면 마리는 의혹의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채 섭정을 했다. 그러나 1630년부터 친정 체제에 들어선 아들 루이 13세와 왕권을 두고 갈등이 심했다. 따라서 루벤스로서는 루이 13세의 심기를 헤아리면서 모후 마리를 만족시키는 한편, 자신의 예술성을 입증해야 하는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1625년 첫 번째 연작 24점이 완성되었다. 왕후의 고문인 아베 드 생트 앙브루아즈는 이렇게 평했다. 


“이탈리아 화가 두 명이 10년이 걸려도 못할 일을 루벤스는 4년 만에 해냈다.” 


연작 중 ‘뫼비우스의 띠’를 푼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리옹에서 마리와 앙리가 만나는’ 장면 묘사이다. 앙리와 마리를 신(神) 제우스와 헤라로 대체했다.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손을 잡았고, 별이 수 놓인 밤의 향연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래 ‘리옹(Lyon)’을 의인화한 여인이 마차를 타고 있다. 머리에 쓴 성벽 모양의 왕관, 특히 마차를 끄는 사자가 알레고리를 푸는 결정적 단서이다. 사자의 프랑스어 발음이 바로 ‘리옹(lion)’이다. 이 점이 바로 "루벤스의 재능 가운데 회화는 가장 하찮은 것이다(스피놀라)"라고 평가받는 점이다.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기반이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루이 13세도 굳이 돌려 표현한 작품에 시비를 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보수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루벤스가 큰 곤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루벤스의 선전 효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리를 향해 계속 수군거렸다. 신화 속 헤라가 제우스의 바람기에 분개하여 끊임없이 남편에게 앙갚음한 것에 비유하여 이 그림이 '그녀가 남편 앙리 4세를 암살했다는 암시'라는 풍문이 돌았다. 물론 입증되지 않은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음에도 루벤스의 두 번째 연작은 완성하지 못했다. 1630년 11월 루이 13세 편에 선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발각(‘뒤프(속은 사람들)의 날’)되어 마리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묘한 인연은 루브르 박물관이 개관한 지 200년 만에 발생했다.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생애를 그린 루벤스의 연작 24점이 박물관 내 루벤스 전시실에 모두 모였다. 마리가 그토록 내치려 애썼던 ‘리슐리외 관’이 증·개축되면서 맨 위층에 자리 잡을 수 있었기에 발생한 일이다. 한편 국외로 쫓겨난 마리는 퀼른에서 루벤스의 도움으로 겨우 허름한 집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1642년 극빈 상태로 사망했다. 불같은 권력 뒤에 숨어 있는 쓸쓸한 이야기다. 왜 권력이 불같냐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가까이 있으면 타 죽고, 멀리 있으면 얼어 죽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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