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회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제르생 화랑의 간판(1720)>은 로코코 시대가 왔음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화랑의 주인 제르생이 작품의 가치를 설명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미술 애호가가 작품 속 님프가 목욕하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러나 오른편 귀부인은 이 작품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나 보다. 의자에 앉아 다른 물건으로 관심을 돌린다. 여기까지는 일반 화랑과 다를 바 없다. 왼편 장면이 중요하다. 한 종업원이 유행이 지난 17세기 양식의 작품들을 창고로 보내기 위해 궤짝에 쌓고 있다. 그중 막 실리는 작품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상화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이 스치듯 지나며 루이의 초상화를 힐끗 쳐다볼 뿐이다.
막강한 절대 왕정을 이끈 루이의 시대가 이렇게 저물었다. 매우 상징적이며, 무상한 권력을 대하는 당시 상류 사회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다. 그러나 작품은 프랑스 역사보다 예술적 경향이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로운 미술, 즉 로코코의 탄생을 알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지한 화가가 바로 장 앙투안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이다. 1719년부터 생활했던 친구 제르생의 골동품 상점 ‘오 그랑 모나르크’의 입구를 장식하기 위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현실에서 삶이 팍팍할수록 환상을 꿈꾸게 되는가 보다. 신화나 성서, 역사화가 주류였던 시대에 무대장치 화가였던 와토는 연극과 현실의 간극을 꿈처럼 황홀하게 표현했다. 독창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새로운 회화 영역을 창조한 것이다. '페트 갈랑트(féte champêtre, 이상적인 향연)'가 그것으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연인들이 야외에서 모여 즐기는 경박한 삶을 드러냈다. 서른세 살 때 로열 아카데미 입회 작품인 <키테라(시테)섬의 순례, 혹은 ‘출항’(1717)>이 당시 귀족들의 취향을 대변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듬해 비슷한 소재로 그린 <키테라섬의 출항(1718)>과 혼동한다. 프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소장했던 이 작품은 베를린에 있으며, 한 번도 루브르에 전시된 적이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키테라는 상상의 섬이다. 바다에서 조개껍데기를 타고 이 섬 해안으로 도착한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을 섬기는 곳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래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의 섬을 가리킨다. 몽환적인 풍경 속 남녀 세 쌍의 태도가 재밌다. 반라(半裸)의 비너스 상이 위치한 숲 속 깊은 곳에 한 쌍이 앉아 있다. 사내는 출항 시간이 다가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상대 여성은 부채를 든 채 싫지 않은 표정으로 약간 수줍어한다. 수동적이다. 왼편 다음 사내는 일어서려는 여성을 붙들어 도와준다. 남녀 간 간격과 호흡이 적절하다. 세 번째 쌍이 핵심적이다. 여성은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 미련을 보이는 데 반해, 남성은 가는 길을 재촉한다. 마치 연인이 밀고 당기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부귀영화와 관련한 인간의 태도를 비유하는 듯하다.
한편, 로댕은 <예술에 관한 대화>에서 언덕 아래 한 쌍을 포함하여 네 쌍 모두가 다른 인물이 아니라, 한 쌍의 연속적인 동작을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와토의 천재적인 발상을 칭찬했다. 그럼, 작품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사랑의 순환 과정을 그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처음 남녀는 조심스럽다. 사내는 확신을 심어주려 하고, 여인은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마음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린다. 이어 사내가 팔을 끌어 일으켜 세우려 하자 여인이 호응한다. 다음 장면은 함께 갈 미래의 방향을 정했으면서 막상 길을 떠나려 하자 여인은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본다. “잘한 선택일까?” 일말의 의심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은 결심이 서자 여인이 오히려 단호하다. 사내의 팔짱을 끼고 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방향을 주도한다. 한 편의 연극이다.
작품은 출항하는 장면이라기도 하고, 섬에서 유희를 그렸다고도 한다. <키테라섬의 순례>보다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성의 버전에서 그의 작품 의도가 비교적 뚜렷이 드러난다. 비너스 상이 전라(全裸)로 바뀌었고, 그 아래 꼭 껴안은 남녀가 장미꽃 덩굴로 단단히 묶였다. 섬을 떠날 수도, 떠날 이유도 없다. 종교적 순례라기보다 사랑에 대한 경배이다. 전체적으로 작품은 화사하면서 경쾌하다. 따라서 로열 아카데미 입회 기념으로 당시 급하게 제출한 <키테라섬의 순례>가 습작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비너스 상이 전라(全裸)로 바뀌었고, 그 아래 꼭 껴안은 남녀가 장미꽃 덩굴로 단단히 묶였다. 섬을 떠날 수도, 떠날 이유도 없다.
그러나 37세에 세상을 떠난 와토의 삶은 그림 같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평생 결핵을 앓았으며 삶은 우울했고, 마지막 길은 외로웠다. 병약했던 탓에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지붕을 올리는 목수 일을 할 수 없었다. 1702년 열여덟 살쯤 무일푼으로 파리에 와서 장식 미장일을 배우려 했다. 그러다가 스무 살 되던 해 오페라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 1673~1722)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대형 그림에 익숙해졌고 솜씨가 뛰어났다.
왕실 화가 클로드 오드랑 3세(1658~1734) 손에 이끌려 궁정 장식 일감을 맡으면서 출세길이 열렸다. 또한 뤽상부르 궁에서 루벤스, 티치아노, 베로네세 같은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섭렵했다. 웅장한 주류 미술을 몹시 싫어했던 그가 이때부터 유려하고 여성적인 양식을 선호했다. 자기 그림을 그리려 로마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장학금을 마련하지 못한 와토는 오드랑 공방을 그만두고 고향 발랑시엔에서 붓을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는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열정, 모호함, 무상함, 그리고 불확실성을 즐겨 담았다. 1710년 미술상 피에르 시루아의 초청으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시루아의 사위 제르생을 만나 평생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앞서 설명한 <제르생 화랑의 간판>도 이런 연유에서 탄생한 우정의 산물이다.
차라리 와토는 <메제탱(1717~1719)>이나 그의 최후의 그림 중 하나인 막간 배우 <지유>를 닮았다. 특히 수심이 가득 잠긴 표정으로 청중을 응시하는 어릿광대 지유의 절박한 외로움이 바로 와토의 내면이다. 그는 폐병으로 인해 변덕이 커갔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언젠가 모욕을 주었다고 여겼던 제자 페이터를 노장(Nogent)으로 불렀다. 그리고 남은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침상에 누워 그림과 데생에 관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전수했다. 훗날 페이터는 화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은 이 두 달 동안 배운 것이라고 서술했다. (마르셀 푸르스트, <독서에 관하여>) 이런 여린 마음에서 ‘페트 갈랑트’ 양식과 비교되는 그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코메디아 텔라르테(이탈리아어 Commedia dell'arte)였나 보다. 16세기~18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이탈리아 희극으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에 의존한다. 따라서 죽기 직전에 완성한 베네치아풍의 <출항>은 그가 지향했던 노스탤지어를 표현했을지 모른다. 고단했던 짧은 삶 속에서도 5년 동안 놓지 않고 희극적인 세상을 그리워했나 보다.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풍이 프랑스 화단을 지배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