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의 정점에는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가 있다. 그의 파스텔 색조의 그림 <마드무아젤 오머피 혹은 금빛 오달리스크>를 통해 로코코 미술을 학습하면, 이해가 쉽다. 루이즈 오머피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부모의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카사노바의 눈에 띄어 세상에 그녀의 미모를 알렸다(說). 이러니 카사노바가 밑도 끝도 없이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루이즈가 맨몸이 부끄러운 듯 엉덩이를 드러내고 소파에 엎드려 있다. 미래의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유명한 <오달리스크>와 비교되는 장면이다. 당시 열세 살 어린 소녀치고는 대담하다. 이부자리가 어지럽혀졌고, 꺾인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향기를 낼 듯 싱싱한 꽃과 소녀의 누드, 이래저래 남성의 관음증을 유발한다. 아니, 그녀 자신이 이를 즐기는 듯하다. 그러나 냉정한 입장에서 그녀의 누드는 몸뚱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면이 나타나지 않은 지극히 퇴폐적인 단순한 눈요깃감일 뿐이다.
1753년, 오머피는 루이 15세의 품에 안겼다. 흥미로운 점은 왕이 부셰의 그림을 보고 오머피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사실이다. 부셰의 관능적 표현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겠다. 부셰는 당시 귀족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속물적 취향을 정확히 반영했다. 그의 회화는 가볍고, 밝고, 호화스럽고, 우아·세련되며, 에로틱하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이런 유행과 취향을 즐겼다. 하지만 국왕과 오머피와의 사랑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녀는 왕을 위한 전용 사창가 격인 '파르 코 세르프'에서 머물며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5만 리브르를 손에 쥐고 귀족 자크 드 보프랑슈와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왕이 보여준 그녀에 대한 대접은 다른 정부 퐁파두르와 차원을 달리했다. 모두 세 차례 결혼했으며. 77세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와토가 떠나고 로코코 시대의 주역을 자처한 부셰가 자신을 20여 년간 후원한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을 그렸다. 그녀는 왕의 정부(情婦), 즉 '코르티잔'의 정점에 있었다. 부인의 희고 투명한 피부,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의상과 장식물,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음에도, 사냥과 각종 사교 모임에 동반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겸손하고 지성적이었으며,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루이 15세를 도와 문화·예술에 관한 정책 조언을 했다. 예술 후원과 왕당파에 의해 금서로 규정한 백과사전의 출판을 도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셰는 그녀의 손에 책을 쥐여주며 문학에 대한 열정과 고상함을 나타냈다. 모리스 캉탱도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향력 있었던 여성,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로코코 시대 유행한 파스텔화 작품이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악보를 보고 있다. 아마추어 소극장을 운영,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거나 노래를 했다. 캉탱은 서른네 살의 그녀를 화려함보다 우아함이 돋보이게 했다. 과리니의 희곡 <충직한 양치기>,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전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볼테르의 <앙리아드>로 배경을 꾸몄다. 실제 그녀는 독서의 폭이 다양하여 서가에 책이 3,500여 권이 있었다고 한다.
평민인 그녀는 어머니에 의해 훈련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금전 사고로 몰락한 후 부유한 르 노르망 드 투르넴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의 돈으로 딸에게 다방면에 걸쳐 최상의 교육을 받게 했다. 고향의 사투리 억양이 모두 사라졌고 고급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루이 15세는 퐁파두르를 1745년 루이 드 프랑스 황태자 결혼 축하연에서 만났다. 자리를 함께했던 사람 모두 그녀가 인사하는 모습에 반해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유부녀였던 그녀는 이혼하고 왕의 정부가 되었다. 왕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가기 위해 퐁파두르 후작령을 사 작위와 함께 건네주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그녀의 외모에 매력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마음이 여렸던 왕은 그녀가 두 차례 유산 후 다른 여인을 소개하는 배려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녀의 교양 있고 예술에 관심과 재능에서 지적 포만감을 느꼈다. 주변의 오만한 귀족계급은 물론 어떤 여인과도 대체 불가능한 그녀만의 힘이었다. 로코코 미술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데도 그녀의 역할이 지대했다. 장식적인 로코코는 당시 무능한 귀족만큼이나 비실용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미술이 유럽 여러 나라를 선도한 첫 사례라는 데 의미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도 그녀의 재능을 인정할 정도였다. 테레지아는 서신에서 그녀를 ‘아름다운 아우님’이라고 불러 우의에 깊이를 더했다.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루이 15세에게 자신은 미모의 젊은 모습으로 계속 비치길 갈망했다. 이 점이 캉탱보다 상대적으로 부셰의 초상화가 대접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부셰의 초상화는 모두 12점에 불과한데, 그중 7점이 자신의 성공을 후원해 준 퐁파두르 부인을 그렸다. 그는 부인의 책을 든 모습을 그렸지만, 젊음과 관능미를 강조했다.
문제는 로코코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지출되어야 하는 많은 예산이었다. 루이 15세는 1774년 즉위한 루이 16세에게 국고의 빚 약 15억 리블을 물려준다. 그리고 이 빚은 1789년 45억 리블로 불어나 프랑스혁명을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퐁파두르 부인이 정치에까지 간여하여 프로이센과 ‘7년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엔 여자를 미워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을 ‘푸아송 양’ 또는 ‘2호 부인’으로 부르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는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쌓아왔던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에 대한 국민 반감을 접어두고 그 편을 든 현실적 이유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불행하게도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데도 굶주린 백성의 원성은 루이 16세의 왕비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중되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원인 중 하나는 퐁파두르의 원래 이름이 불러일으킨 오해라고 한다. 그녀의 이름 ‘장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이 마리 앙투아네트로 둔갑한 후 그녀의 사치로 부풀려졌다는 주장이다. 어쨌거나 퐁파두르는 1764년 마흔두 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식 부인이 아니어서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던 루이 15세는 외투와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임이 틀림없다. 그녀의 묘비명은 이러하다.
“이곳에 20년간은 처녀로, 15년간은 창녀로, 7년간은 뚜쟁이로 지낸 여인이 잠들어 있다.”
인물의 순간적인 동작과 표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부셰는 작품 속에서 근심 없는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 장식에도 능했고 오리엔트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그의 그림 배경에 도자기를 비롯한 중국 문물을 등장시켜 판타지를 창조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20여 년간 그를 후원했으며, 그녀 사후에도 그의 명성은 여전하여 1765년 궁정 수석 화가, 왕립 미술 아카데미 교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의 육체에 지나치게 천착했다. 적대적인 비평을 망설이지 않았던 평론가이자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가 부셰를 향해 일갈했다.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누구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런 광경을 엉터리라고 생각할 테지만, 거기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혹적인 악(惡)이기 때문이다.”
반면, 르누아르는 부셰의 <디아나의 목욕>을 보고 ‘나를 흥분시킨 최초로 그림’이라며 그를 가리켜 “여성의 몸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유유상종이다. 하지만 나무랄 수만은 없는 또 다른 삶이다. 그가 죽은 지 10년, 새로운 양식이 프랑스를 사로잡았다. 미술을 통해 도덕적 교훈을 전달할 수 있다는 신고전주의이다. 대표 화가 다비드와 그 제자들에 의해 부셰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