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8년 30년 전쟁이 끝났다. 유럽의 강국 중 유일하게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그러나 찰스 1세가 영국의 입헌주의를 정착시킨 ‘마그나 카르타’의 약속을 어기고 전횡을 휘두르려고 했다. 결국, 그는 1649년 참수당했고, 종교적으로 엄격한 올리버 크롬웰이 ‘국가의 수호자’로서 영국을 통치했다. 이제 프랑스가 명실상부한 유럽의 절대 강국이 되었다. 1643년 아버지 루이 13세가 갑자기 죽자 장남인 루이 14세가 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는 프롱드 난(1648∼1653)을 극복하고 무려 72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는 영국 찰스의 교훈을 괘념치 않고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왕의 권세와 위신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유명하다.
“짐이 곧 국가이니라.”
실제 그가 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분명했다. 파리 근교에 베르사유 궁전을 건립했다. 5.000명의 권세 귀족은 궁정에, 기타 5,000명은 그 인근에 살았다. 지방의 봉건 영주들을 불러 모아 지근거리에 두고 감시 감독했다. 그들은 점차 지방에서의 세력이 축소되었다. 루이는 파티와 연회를 개최하여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 주었지만, 국정에서 한눈팔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의 <루이 14세의 초상>에 절대왕정이 무너지는 단서가 있다.
담비 털을 덧댄 황금 백합 무늬가 수놓아진 파란색 대관식 망토를 입고 연단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 백합 문양은 왕좌, 푸른 방석, 그리고 오른손에 쥔 왕홀(군주의 지휘봉)에도 장식되었다. 프랑스 왕실을 상징한다.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 달리 금 목걸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대관식용 검(일명 사률마뉴의 검), 방석 위에 놓인 ‘정의의 손’과 왕관 모두 프랑스 왕의 상징물, 즉 레갈리아(Regalia)이다. 루이는 힘을 상징하는 기둥 앞에 서 있는데 받침 부분은 ‘정의’의 알레고리(寓意)인 여인상이 저부조로 장식되었다. 한 손에 저울,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든 상징성은 백성을 대하는 국왕의 첫 번째 덕목이 바로 정의라는 사실이다.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도록)
바로크 양식의 이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이다. 독특한 점은 흰색 공단 스타킹과 빨간 굽에 빨간 끈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는 자세가 매우 부자연스럽다. 두 발이 직각으로 놓여 있으며 내민 발은 정면을 향했다. 다이아몬드 죔쇠가 있는 신발은 루이의 작은 키를 덮어주며, 가늘고 우아한 다리는 젊은 발레 댄서의 동작을 구사했다. 검은 가발 역시 홍역을 앓아 빠진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부어오른 얼굴에 처진 눈과 볼, 코 옆으로 뚜렷이 드러난 팔자주름은 65세 늙은이임을 숨길 수 없다. 결정적으로 ‘합죽이’ 같은 다문 입술이 꾸미지 않고 묘사되었다. 그는 대식가였다. 매 끼니마다 30 접시의 음식을 먹었고,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치아와 위장이 약해졌고, 고통을 호소하는 왕에게 수석의 다캥(Antoine d’Aquin)이 이빨을 전부 뽑아버릴 권했다. 사혈(瀉血) 치료의 방편이다.
마취도 없이 시행하는 위험천만한 시술이었다. 아래턱에 금이 가고, 소독한답시고 뜨거운 쇠막대기로 14번을 지진 입천장에 구멍이 뚫렸다. 음식물이 콧구멍으로 역류했고, 어떤 것은 며칠이 지난 뒤 콧구멍으로 튀어나왔다. 만성 염증이 생겨 악취가 났다. 이후 씹지도 않은 음식을 삼켜야 했고, 장 내엔 가스가 차서 늘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게다가 당시에는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생기거나 전염병이 옮는다는 속설로 몸을 잘 씻지 않았다. 악취는 더욱 지독했고, 치루까지 생겼다. 관장으로 배설을 도왔는데, 화장실이 그의 주된 정무 공간이 되었다.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인 그의 가는 다리 모양이 이상하다. 발레 모양을 취한 듯하지만, 통풍의 증세를 가리기 위한 자세라 한다. 당시 잘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방증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루이는 국정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의 실권자가 맹트농 후작부인으로, 공교롭게 이즈음 내치에서 루이의 결정적인 실책이 저질러진다. 1685년 낭트 칙령이 철폐되고, 1685년 신교도를 탄압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공표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한다. 대부분 수공업자와 신흥 상인들로 구성된 30만여 명의 위그노가 영국, 프러시아, 미국 등 해외로 망명했다. 단순한 인력 유출이 아니다. 먼저 이들 중 정교한 기계장치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스위스가 시계산업에서 영국을 제치고 세계를 주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우로 기옌, <2030 축의 전환>) 또한 칼뱅파인 그들은 자본의 순환과 금융에 매우 밝았다. 따라서 부(富)와 함께 그들의 전문적인 경제지식도 빠져나가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사실 프랑스 대혁명은 재정 악화로 인해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그 재정 악화의 시작은 루이 14세 때였으니 그의 치통이 절대왕정의 운명을 흔들었다면, 비약일까? 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괜히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 <베르사유 궁전(1665~1682)>에서는 ‘거울의 방’이 가장 유명하다. 이곳은 수많은 샹들리에와 거울로 인해 절대왕정의 화려함을 연출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광만 머무르진 않았다. 하지만, 세상엔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늘이 함께한다. 루이 16세 때까지 절대왕정을 지켜왔던 베르사유 궁전은 이후 프랑스의 영광과 오욕(汚辱)의 역사가 교차했다.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빌헬름 1세가 1871년 황제 대관식을 이곳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었다. 프랑스는 이 수치스러운 역사를 지우려는 듯, 1919년 같은 장소에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791년 국외로 도망치려다 잡힌 루이 16세가 몰려든 군중에 의해 파리로 귀환하면서 절대주의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은 그 역할을 마쳤다. 1837년, '시민들의 왕' 루이 필립에 의해 궁과 부속 건물 모두 국립미술관으로 개방되었다.
1715년에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공 루이 14세가 죽었다. 더불어 왕의 권위와 명예를 찬양했던 바로크의 빛도 스러져갔다.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도 1715년에서 1774년까지 59년간 프랑스를 지배했다. 루이 14세와 합치면, 무려 131년이란 세월이었다. 당시 루이 15세는 다섯 살이었다.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을 했다. 그는 환락을 좋아했다. 귀족과 함께 서둘러 파리로 돌아가서 베르사유궁에서 향유했던 놀이문화를 마음껏 즐겼다. 서슬 시퍼런 태양왕에 의해 억눌렸던 그들만의 사치와 향락 문화가 더욱 번성했다.
1723년 이번엔 오를레앙 공이 여성의 품에서 죽었다.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이 재상이 되어 섭정했으나 무능했다. 1726년부터 루이 15세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무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플뢰리에게 일임하고 마지막 공식 후궁 퐁파두르 후작 부인(제목 그림은 부셰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1756))과의 시간을 즐겼다. 그녀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멸시를 받자 반동 세력, 즉 작가·예술가 등 지식인을 지원했다. 이때 생긴 로코코(rococo)란 말은 ‘로카이유(rocaille)’와 '바로크'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로카이유는 석굴이나 분수를 장식하는 데 쓰인 조개 장식에서 비롯되었다. 과하게 꾸며진 장식을 의미한다. 귀족적 취향이라는 고백으로, 루이 15세 통치 기간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 사조이다. 처음에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바로크의 거창한 허세에 반발하여 탄생한 미술이다. 화풍이 경쾌하면서 화려하지만,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고 가볍다.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으며, 유희적이고 때로는 성애적이다. 결국, 엄격하고 도덕적인 교훈을 형상화한 신고전주의에 의해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혁명 전 구체제)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