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4세의 초상>과 <카프리초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를 바로크 화가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화풍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 때문이다.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심지어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까지 연결된다. 단지 벨라스케스를 소개하면서 내친김에 그를 줄 세웠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고야를 일컬어 ‘출세 지향적’이었다고 평한다. 맞는 말이다. 후진적인 스페인 예술 환경을 의식하여 때에 따라 자신의 탐구 정신을 숨길 줄 알았다. 정치적 실력자에겐 기꺼이 무릎도 꿇었다. 그의 첫 번째 공식 초상화는 <플로리다 블랑카 백작>이다. 부르봉 왕가의 계몽주의 군주 카롤로스 3세(그림 속 벽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를 도와 스페인 재건에 힘쓴 인물이다. 붉은색 겉옷에 반짝이는 금빛 셔츠를 받쳐 입은 블랑카 백작은 어두운 배경으로 인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고야가 직접 왼편에 등장하여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그의 허락을 구한다. 그러나 재상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그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하튼 고야의 이런 노력이 열매를 맺어 1774년 궁정 태피스트리 밑그림부터 시작한 그는 1786년 궁정화가에 임명되었다.
그의 이상과 현실 간의 갈등은 1788년 말 카를로스 4세가 등극하면서 시작되었다. 왕은 지성과 거리가 멀었다. 사냥에 빠져 있었다. 선왕 시절의 번영은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탔다. 1792년 급기야 마누엘 데 고도이가 재상에 오른다. 그는 마부 출신이면서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연인이었다. 1799년 궁정 수석 화가로 임명된 고야는 1800년 여름 아람페스 궁전에서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을 그렸다. 가족 전신상으로, (고야를 제외한) 13명을 세심한 관찰을 거쳐 한 인물당 열 장이 넘는 드로잉을 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초상화에는 당시 스페인에 없던 인물 두 명이 포함되어 있다. 전면 왼쪽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인물이 훗날 왕위에 오르는 페르난도 7세다.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쫓아내고 즉위하려 했으며, 말년의 고야와 악연을 이룬다. 그 왼편에 서 있는 약혼녀가 첫 번째 궐석 인물이다. 고야가 얼굴을 본 적이 없어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처리했다. 영악했다. 두 번째는 고인이 된 여인으로, 카를로스 4세 오른편에 얼굴만 조그맣게 나왔다. 이런 이유로 이전 왕실 초상화와는 달리 모든 인물의 시선이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오히려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받았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행한 부르주아 초상화풍과 합스부르크 시대 사실주의적 전통을 합성한 단체 초상화다. 고야 자신의 모습도 담았는데, <라스 마니나스(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를 차용했다. 다만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고야는 벨라스케스를 존경했다. 그리고 그의 출세까지 닮기를 열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겐 세 스승이 있었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그리고 자연이다."
흥미로운 점은 왕 대신 마리아 루이사를 중앙에 배치했다. 오른팔로 공주 도냐 마리아 이사벨을 감싸고, 왼손으로 여섯 살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이다. 파티 의상은 번쩍거렸지만, 얼굴은 늙어 쭈글쭈글하고 입에 잘 맞지 않는 틀니로 인해 입 주위가 어색하다. 그리고 우쭐대는 태도는 머리가 빈 인물이 권력의 정상에 섰을 때 흔히 나타나는 모양새이다.
그림에서 등장인물 ‘13’이 주는 불길한 상징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생겼다. 특히 무능했던 왕과 고도이와 불륜에 빠진 왕비 마리아 루이사 등 왕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날카롭다. 처음에는 그들이 고야의 강력한 후원자임을 고려하여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타락한 군주제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고야는 1778년 처음 병후를 보였던 청력 상실이 악화되어 결국,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궁정 회화를 접는다. 미래를 예견했을까? 1802년부터 취약한 정치기반을 지닌 궁정과 거리를 둔 가운데 개인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이 초상화에 풍자를 담았고, 훗날 이런 중의적(重意的) 해석을 고려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오늘날 한 비평가는 이들이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 잡화상 일가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이 어떻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그것이 의아스럽다. 예술을 대하는 눈도 어두웠나 보다.
고야는 렘브란트처럼 수많은 판화를 제작했다. 특이한 것은 성경, 역사, 그리고 풍속 등 어떤 주제이든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그중 판화집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1797~1798)>는 고야 개인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크다. 그를 출세주의자로만 보는 시각을 교정해 준다.
그중 가장 유명한 판화가 43번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이다. 제목은 동판화 모음집의 첫 장에 쓴 문장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신봉했던 ‘이성’, 그 위험한 양면성을 드러냈다. 깨어 있는 이성은 위대하지만, 잠든 이성은 위험하다. 그래서 신은 인간을 파멸시키려 할 때 먼저 이성을 빼앗아간다. 판화 속 부엉이, 박쥐 등 야행성 새와 굶주린 고양의 눈빛은 이성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비로소 등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선각자 고야가 먼저 제기하는 형국이다.
카프리초스는 ‘변덕’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자유로운 상상으로 그린다’는 뜻이다. 에칭(산의 부식작용을 이용한 판화) 시리즈 82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의 진보적 실험정신이 잘 나타난다. 1789년 착수한 이 판화집은 무능하고 부도덕한 카를로스 4세의 정권과 스페인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꿈, 괴물, 주술, 광기 등의 도구를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했다. “어떻게 해도 해소되지 않는 스페인의 수많은 모순”을 나열했으니 당시로서는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도전은 실패했다. 1799년, 판매 행사가 시작되어 27점의 사본이 팔린 지 이틀 만에 이단심문소에 의해 중단되었다. 자유롭다 못해 지나치게 선동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으며 교회 전가의 보도,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내세울 만한 배경이 없었던 고야에게 현실은 냉혹했다. 재능과는 달리 마드리드로 가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스물네 살 늦은 나이에 이탈리아로 그림 공부를 떠났다. 거친 청년기를 보냈고, 특히 부패한 군주제를 비판하는 예술가 모임 ‘일루스트라도스’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비판의식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이 왕실의 녹을 먹는 궁중 화가라는 굴레를 쓰고 있었다. 이 판화집도 운 좋게 잘 넘어가면서 그해 10월 31일, 마침내 수석 궁정화가 직위에 올랐다.
민중의 삶과 고통을 담기 시작한 것은 1792년 청력을 잃고 오히려 일감이 떨어지면서부터다.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른 후 벌어진 독립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의 참화(1810~1820)> 82편을 완성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에칭 연작은 그가 사망하고 50년이 지난 후에야 출판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저지른 수탈과 폭력을 다룬 연작으로, 학살로 인해 죽은 이들을 위한 진혼곡 성격을 띠었다. 생전에 공개되었더라면,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어 투우 연작 판화집 <타누로마키(1815)>, ‘광기’, ‘부조리’로 번역되는 <디스파라테스(1816~1823)>를 작업했다. <카프리초스>의 신랄한 풍자에 비해 <디스파라테스>는 수수께끼와 답을 찾을 수 없는 난센스의 영역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캐스터네츠를 치는 거인, 나뭇가지에 걸린 인간,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마녀 등등. 상상력에 제한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한 판화 작품은 그 파급력으로 인해 고야라는 이름을 전 유럽에 알렸다.
1819년이 되자 그는 마드리드 근교에 ‘라 킨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을 구입했다. 청력을 잃어 마침내 귀머거리가 된 그의 처지와 우연히 맞아떨어진 집의 이름이다. 1820년 말, 그는 세 번째 중병이 재발하였으나 주치의 아리에타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후 이곳 거대한 식당과 응접실 회벽에 뭉크의 <절규>와 같은 소위 ‘검은 그림’ 14점을 그렸다. 처음에는 완전히 취향이 다른 파노라마적인 풍경화였다. (X선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로, 사카이 다케시, <니체의 눈으로 다 빈치를 읽다> 참조) 본부인 호세퍼 바예우가 죽은 후 42년 연하인 내연의 처 레오카디아 소리야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살 딸 로사리오와 함께 살았다. 오싹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그 집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1823년 어느 날부터 그렸을 것이다.
페르난도 7세가 왕위를 되찾은 후 반동 정치를 시작하면서 종교재판소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자유주의자와 개혁주의자가 대대적으로 숙청되자 고야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고야는 1820년 4월 마드리드 미술 아카데미에서 열린 의회제 민주주의를 골자로 하는 '카디스 헌법' 발기 대회에 참가, 서약했다. 그리고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레오카디아와 함께 일가는 1823년 9월 '귀머거리의 집'에서 나와 시내의 친구 집에 숨었다. 따라서 손주에게 집을 양도하면서 남긴 이 작품들은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작품이다. 1819년 페르디난트의 유일한 선정(善政)으로 건립한 프라도 왕립미술관에 그의 작품은 고작 두 점만 전시되고 있었다. 환영에 시달리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역작을 민중에게 공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귀머거리의 집은 그의 미술관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보아야겠다.
요양을 핑계로 1824년 프랑스를 방문한 그는 그곳에 남아 작품 활동을 했다. 파리 살롱전에서 이미 고인이 된 제리코의 그림과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을 보았다. 낭만주의 시대에 죽음과 광기의 표현에 있어서 제리코와 유일하게 경쟁이 된 화가가 고야다. 그러나 굳이 두 사람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온몸으로 삶을 체감했던 고야의 편에 서고 싶다. 그는 눈도 어두워가는 가운데 최후의 걸작 <보르도의 우유 파는 여인(1827)>을 그렸고, 이듬해 82세로 사망했다. 시신은 이국 땅 스페인 망명객의 무덤에 합장되었다가 1929년 그의 천장 프레스코화 <성 안토니오의 기적(1789)>가 있는 마드리드 동쪽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으로 옮겼다.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고야의 회화 양식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굴곡진 역사를 따라가면서 내면의 번민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을 뿐이다. 따라서 스페인 근대 회화의 출발점을 이룬 고야의 성과를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며 함부로 깎아내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