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1) 흐미하게 날이 밝아 오는 빛 또는 그런 무렵. 2) 쇠잔한 목숨

by Dr Sung

여명이다. 예전 여명의 눈동자라는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막일어나 세상이 아직 깨어나기전 뭔가 고요한 상태에서 나 홀로 깨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딱좋은 시간이다. 5살. 대학에 입학하고난 뒤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미선인 벌써 어른이 다 되어 있었다. 글쎄 내 다섯살때를 생각해보면 역시 거기에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겹쳐져있다. 창덕궁 후원? 한 때 비원이라고 불렀었던 고궁에 갔었다. 아버진 날 올려안고 터벅터벅 작은 다리같은 곳을 건너고 있다. 다리를 거이 다 건너자, 난간 끝 돌기둥 위에 나를 앉혔다. 난간아래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난간의 높이가 높아 무서웠다. 눈을 내 눈높이에 맞추고는 "s야. 아빤 이제 전쟁터로 나간단다. 혹시 못 돌아올 수 있어. 만약 아빠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엄마 모시고 잘 살아라. 엄마 말 잘 듣고..." 그 때 내가 생각했던건 '아 아버진 뭔가 우리 가족보다 중요한게 있구나. 죽어서까지 지키고자하는 뭔가 나보다 훨씬 중요한게 있구나' 였다. 사진을 찍었다. 액자 안에 부부가 멋진 양복, 양장을 입고 굽높은 반짝이는 가죽 구두에, 가죽 핸드백을 들고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 어두운 표정. 뭔가 불안해보이는. 혹 불행이 닥치더라도 이 불행이 닥치기 전 우린 정말 너무 행복했었다라를 걸 증명하는 증거를 남기고자 하는. 전각 앞 계단 옆 난간에 해태인지 뭔지 동물같은 게 있었는데 누나 셋과 같이 나란히 올라타고 있는 걸 옆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액자에 들어있지 않고 앨범구석 한칸에 있었다. 난 낡고 색이 바랜 아이용 자켓, 누나들은 빨간색 원피스 그나마 큰 누나는 무지개색 줄이 있는 낡은 스웨터같은 것 입고 있었다. 모두 하얀 스타킹을 신고, 신발은 모두 낡은 운동화였다. 무언가 연기하듯 보이는 장면. 아이들의 표정은 어둡고,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이 불편해 보인다.


그 사진 속 어두운 표정들과 비교해보면 미선인 너무나 밝다. 항상 웃는 모습.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하는 노력. 어찌 세상에 다섯살 아이가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지 의문이다. 부잣집에 태어나 여유를 느끼고 살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다섯살 아이가 18살 짜리를 걱정하는, 살아봤자 6개월 남짓이라는 걸 알게되면 오히려 이런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인가? 벌써 날이 밝아온다. 겨울이라 좀 늦기는 하지만, 저 멀리 산 능선을 따라 밝은 빛이 점차 세지면서 능선이 점점 뚜렷하게 구분된다. 조금 있으면 이제 어제 저녁 서쪽 하늘을 넘어갔던 해가 저 능선위로 다시 떠오르겠지? 저물어간 나의 청춘의 시간들은 저 여명의 햇살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그 시간 그 시절들을 떠올리며 글로 남겨 기억 속 서서히 흐려져가는 안타까운 장면들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싶다. 다시금 조금만 더 선명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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