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어 카를이 죽으면서 당시 9살이던 아들 카를(맞다 부자의 이름이 같다)을 베토벤과 아내 요한나에게 맡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동생은 베토벤이 아버지의 역할을, 요한나는 엄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동시에 “내 아들을 위해 형님과 아내가 서로 화해하기를 바랍니다.”라고도 적었다는데, 슬프게도 이 부분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둘은 원체 사이가 안 좋았다. 베토벤은 이전부터 동생의 아내를 탐탁치 않아했고, 그녀가 제대로 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철썩같이믿었다.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오롯이 가져오기 위해 2년간의 법적 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기록된 법적 분쟁이 2년이니 적어도 3~4년간 서로에게 으르렁댔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토벤은 마지막 로맨스 이후 자신이 더 이상 결혼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런 연유에서 조카 카를은 자신의 유일한 핏줄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명성을 잇거나 자신이 가진 재산을 물려줄 유일한 후계자였을 것이다. 다만 의문인 것은, 백부로서도 충분히 카를을 보살필 수 있었는데 굳이 엄마인 요한나에게로부터 카를의 양육권을 빼앗아야 했을까?
*조카 카를의 모습. 카를은 자신의 아들에게 삼촌과 같은 '루드비히'라는 이름을 붙여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이름을 다시 세상에 남겼다. 하지만 이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은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루이스 폰 호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 그는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베토벤 가문은 이렇게 맥이 끊겼다.
어쨌든 베토벤은 몇 년 동안 요한나에게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 ‘엄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여자이다’라며 카를의 양육권을 주장하였고, 요한나 또한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실에 딴지를 걸며 자신의 아들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법적 분쟁이 2년이나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이 둘의 주장은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실도 막상막하였겠지.)
실질적으로 베토벤은 이 기간 동안 분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의뢰로 들어온 작품들만 간간히 완성했다. 어느 해에는 그의 작품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베토벤은 이 분쟁에 진심이었다. 결국 재판장도 지쳤는지 긴 사투 끝에 베토벤의 손을 들어준다.
*스포 주의.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 불거질 시기에 영화 <불멸의 연인>이 개봉했다. 베토벤이 사랑했던 ‘불멸의 연인’ 후보들을 통해 베토벤의 인생과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여기서는 베토벤의 조카 카를이 사실은 베토벤의 아이였기 때문에 베토벤이 요한나와 애증의 관계이며, 이러한 내막 때문에 베토벤이 카를에게 집착했다는 서사를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내 입장에서는 공룡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가 호박(보석) 안에 온전히 보존되어 그 피를 통해 다시 공룡을 복원했다는 <쥐라기 공원>과 같은 맥락의 픽션이다.
이렇게 또 행복하면 다행일 텐데, 아쉽게도 카를은 행복하지 못했다. 당시 9살이던 카를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초등학교 2학년이다. 그 어린 카를은 아버지를 잃고 애도할 틈도 없이 몇 년 동안 서로를 헐뜯는 엄마와 삼촌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양육권을 가져간 삼촌은 엄마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았다.
그 이후로도 베토벤은 괴팍한 성격으로 카를에게 집착하여 카를을 힘들게 했다.
베토벤이 조카가 자신만큼 열정 넘치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기를 바랐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줄 위인이 되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레슨을 하는 와중에도 답답하다는 이유로 다른 제자들의 어깨를 냅다 깨물어버리는 베토벤의 밑에서 카를이 지쳐가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의 고집 세고 괴팍한 베토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힘들어하는 카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카를은 계속 베토벤의 뜻과 반대로 엇나가기 일수였다. 아마 힘들어하는 카를에게 위로보다는 “다 널 위해 그런 거야”, “왜 아직도 모르겠니”와 같은 이기적이고 신파적인 대사를 뱉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 1826년, 20살이 된 카를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이 사건은 미수로 그쳤고, 충격을 받은 베토벤은 그제야 자신이 카를에게 했던 일들을 뒤돌아본다.
양육권 분쟁은 베토벤 역시 힘들게 하였고, 실질적으로 분쟁 이전에 베토벤은 밖으로 분출하는 활화산 같은 열정적인 작품을 작곡했다면, 분쟁 이후로는 좀 더 내면세계에 집중하는 듯한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 절정은 베토벤의 나이 54세에 남겨진 마지막 교향곡 <합창>이었다.
이 작품에 대해 논하기 전에, 베토벤은 귀가 점점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했다. 원래도 과한 동작들로 지휘를 하는 편이었던 베토벤이 들리지 않는 상태로 지휘를 하다 보니 지휘자는 펄쩍 뛰고 있는데 오케스트라는 조용한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의 초연이 끝난 뒤 악보를 정리하던 베토벤에게 가수가 다가와 그의 옷소매를 잡고 뒤를 가리켰다. 들을 수 없던 베토벤은 그제야 모든 관객들은 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러던 와중에 걸린 감기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그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은 영국 왕립 음악 협회는 그에게 100파운드를 전달한다. 영국의 소비자 물가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1800년대와 2000년대의 물가는 약 20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시의 100파운드는 현재 기준 2000파운드이며, 현재 환율 기준(1,600원)으로는 3,200,000(삼백이십만 원)이다. 아무리 음악 협회라고 하더라도 영국인도 아닌 베토벤의 건강을 위해 영국에서 몇백만 원의 돈을 마련했다는 지점에서 우리는 당시 베토벤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우리나라의 대표 댄스가수 이효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음악 협회에서 몇백만 원을 공적으로 보낸 것과 비슷하려나.)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감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목격자가 많다 보니 모차르트처럼 의문은 없지만 루머가 많다. 하늘 위로 주먹을 뻗어서 “희극은 끝났다!”라고 말하며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더라도 참 어울리는 마지막 장면이다.
1827년,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인구가 약 25만 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약 10%의 인구가 베토벤의 마지막을 지켰다는 것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로 치자면 전체 인구의 약 10%, 95만 명이라는 인파가 음악가의 장례식에 참여한 것이다.
비록 여성들에게는 인기도 없고 결혼도 못했던 괴팍한 예술가였지만, 무엇이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는 생각하는 것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던 고집은 음악의 성인을 만들었고, 우리는 150년이 넘도록 그의 음악을 듣고 있다.
다음 시간에는 베토벤이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걸쳐 남긴 그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음악의 성인이 남긴 음악이라니, 나는 이 말이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더 신화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