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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Feb 15. 2022

베토벤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까? (1)

가혹한 아버지와 괴팍한 아들의 사투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3.26.


‘빰빰빰 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고?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다.

https://youtu.be/NWWbA5H5pEs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 이 10초도 되지 않는 앞부분은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이 교향곡의 이름을 까먹고, 번호를 까먹고, 심지어 베토벤의 작품인 것을 까먹어도 수없이 반복되는 이 악상은 ‘그거 뭐더라, 그거 빰빰빰 빰~~~’하며 어느 순간 당신을 괴롭 것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명성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들리지 않는 작곡가’라는 타이틀이다.


당연히 음악가에게 ‘들을 수 없음’은 치명적이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자신의 음악이 맴돈다고 하여도 을 점점 잃어가는 가와 무엇이 다를까. 머리에 담겨 있음악을 악보로 만들 수는 있어도 이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연주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베토벤의 청력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결국 그의 생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무리 과거의 명성이 화려하여도 돈을 주고 작품을 맡긴다고 하였을 때,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에게 서슴없이 곡을 의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두려움을 느낀 32살의 베토벤은 요양원에서 자살을 생각하며 유서를 썼다. 그런데 이 유서마저도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유서의 마지막에는 ‘아니다, 그래도 작품을 더 많이 쓰기 위해 더 살아야겠다.’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엥)


*1820년, 장엄 미사를 작곡하는 모습의 베토벤. 그의 나이 50세였다.

*가발과 옷을 단정하게 챙겨 입은 같은 악파의 하이든(왼)과 모차르트(오)의 초상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찌푸린 상태로 초상화를 남겼다. 당시 같은 고전악파로 분류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에 비교하면 옷매무새나 자세도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그는 아마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완성해야 하니, 내가 작곡하는 동안 마음대로 그리시오. 다만, 절대로 나에게 말 걸지 마시오."


앞을 바라보지 않고 허공을 째려보는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은 악곡을 두고 씨름 중인 건지 어딘가 괴팍해 보인다. 아니, 어딘가가 아니라 그냥 괴팍해 보인다. (이런 비슷한 인상의 사람을 딱 한 번 본 적 있는데, 그는 내 고등학교 학생주임이셨다) 여러모로 가까이할 수가 없는, 굳이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이미 죽은 사람 서럽게 왜 이렇게 까내리냐고? 나는 그의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도저히 베토벤을 사람으로서는 사랑할 수가 없다. 잘 말해보려고 해도 솔직히 그는 괴팍하다는 표현을 넘어서서 ‘괴팍’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그는 식당의 스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업원의 얼굴에 그릇을 던지는 진상이었고, 악상이 떠올랐을 때는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곡을 써 내려갔다. 그래서 그의 집 커튼과 식당의 냅킨에는 악상이 실컷 그려져 있었다.


집안은 항상 더러웠고, 무엇보다 그의 제멋대로이고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주기적으론 베토벤의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인지 통과 의례(?)를 거쳐야 했다. 베토벤은 꼭 한 번씩 친구들을 그리 들들 볶고 괴롭히고 의심하다가도 자신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죄책감에 시달려 진심 어린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바뀌는 과정과 그 시간이 얼마나 갈대와도 같은지 ‘너는 배신자야. 배신자는 교수형을 당해야 해. 다신 나를 볼 생각하지 마.’라고 전날 편지를 보내 놓고 다음날에 ‘미안해. 자네가 옳았어. 오늘 오후에 날 만나러 와주지 않을래?’라고 편지를 보냈다. 여러모로 인성이 그리 바른 사람 같지는 않지?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아직 할 말이 더 있다.


*20대의 베토벤. 아버지의 혹독한 음악 교육 탓이었을까 아니면 베토벤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베토벤이 정규 교육과정을 받은 7세~11세로 4년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모국어인 독일어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가 타이틀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황제, 왕족, 귀족은 무시하기 일쑤이며 그 어디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았다. 이 근자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젊은 시절 초상화에는 로마 황제들의 자세를 따라한 모습이 남아있다. (베토벤은 자신이 나름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만큼 자기 자신과 음악에 대한 자신감은 또 철철 넘쳤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음악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아… 참으로 가까이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그가 당대의 훌륭한 음악가에다가 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카핑 베토벤>(2006) 속 묘사된 베토벤의 모습.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이라고 적힌 수취인 불명의 10페이지짜리 러브레터가 남겼다. 보내지도 못한 이 편지는 아직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여인이 누구인지 의견이 분분한데, 이를 소재로 만들어진 픽션 영화 중 하나이다. 비록 픽션이긴 하나 베토벤에 대한 묘사와 연기가 훌륭하여 매우 추천한다!


아, 그리고 ‘베토벤’이라는 이름의 뜻마저 ‘덩굴 밭’이다. 그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이 이름을 따라간 건지 이름이 인생을 따라간 건지 하튼 너무 어울린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덩굴 밭… 아니, 베토벤의 인생을 알아보자.


1편에 언급한 대로 모차르트와 비교하였을 때 베토벤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일단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모두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음악가인, 정통 있는 음악 집안사람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빨리 알아보았지만,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모차르트는 이미 완성된 신동이었던 것에 비해 베토벤은 신동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신동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모차르트의 명성이 부러웠던 베토벤의 아버지 ‘요하네스’는(베토벤의 아버지가 주정뱅이인지 아닌지는 역사가들이 설왕설래하지만)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에는 어린 베토벤을 깨워서 악기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회식하고 들어온 아버지가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는 아들을 오밤 중에 깨워서 수학 문제집을 풀라고 한 거랑 마찬가지이다. 이뿐인가, 연습을 게을리하면 체벌이나 밥 굶기기를 서슴지 않았고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결국 요하네스는 베토벤이 8살이 되던 해, 베토벤의 나이를 2살 어리게 속여 첫 독주회를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하네스는 베토벤에게 음악의 길을 걷게 만들었고, 베토벤 역시 음악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차이점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신동이었던 모차르트는 아버지보다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완벽히 독립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역시 죽는 순간까지 모차르트를 걱정했다. 그에 반해 베토벤은 자신에게 가혹하게 음악을 시키는 아버지 밑에서 반골적인 성향과 극기심을 키워갔다. 점차 그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 되어갔고, 10살이 되자 드디어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7살, 베토벤은 빈에서 어린 시절의 원수(?) 모차르트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하던 베토벤의 연주 실력에 모차르트는 시큰둥했다. 약간 열이 뻗친 베토벤은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즉흥 연주를 뽐냈다. 베토벤의 즉흥 연주를 들은 모차르트는 옆방에 가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저 청년을 잘 지켜봐. 머지않아 세상을 놀라게 할 테니까.”


베토벤은 고전악파의 또 다른 주역인 하이든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이런 후한 평가에 비해 하이든은 제자로서 베토벤을 아주 미워했다!


(그 이유는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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