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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Feb 19. 2022

베토벤은 왜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까? (2)

들리지 않는 음악가와 허일리겐슈타트 유서

베토벤은 고전악파의 또 다른 주역 ‘하이든’의 제자였다. 그 기간이 1~2년 사이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으나, 여러모로 베토벤이 미움받기엔 딱 좋은 기간이었다.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일단 이 둘의 예술관은 너무나도 달랐다. 일단 하이든은 60세가 되는 나이였고, 이전부터 그의 성격은 아주 상냥하고 친절하여 하이든이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용주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갈등을 빚은 적이 없으며, 갈등이 생기더라도 음악으로 이 갈등을 표현했다. 이러한 성격 덕분에 그는 ‘파파 하이든’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그의 삶 역시 정직하고 건강해서 그의 작품들 역시 이러한 면모를 닮아 밝고 건강한 느낌이다.


*하이든의 고용주 에스테르하지 공은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고용주였다. 일단 다른 고용주들처럼 작품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았으며, 오케스트라도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구성하였다. 덕분에 하이든은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유일한 갈등은 에스테르하지 공의 너무 과한 사랑으로 인해 궁정악단들이 너무 오랫동안 휴가를 가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을 캐치한 하이든은 <고별>이라는 교향곡을 썼고, 마지막 악장에서 자신의 파트가 끝나면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눈치가 빠른 에스레트하지는 바로 다음날에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https://youtu.be/vfdZFduvh4w

음악이 끝나갈수록 한명씩 나가는 연주자들을 볼 수 있다. 약 5:00부터 보면 지휘자분이 점점 난감해하는 퍼포먼스도 볼 수 있다.(ㅋㅋ)


반대로 베토벤은 열정 넘치는 10대였던데다가, 전 편에 설명했듯이 그의 성격은 너무나도 괴팍했다. 베토벤의 눈에 하이든은 그 시대의 틀에 박힌 늙은이였을 것이고, 하이든의 눈에 베토벤은 날뛰는 산짐승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무서울 것이 없던 베토벤은 결국 하이든이 런던에 간 틈을 타서 스승을 바꿔버렸다.


이 둘 사이를 잘 나타내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토벤을 빈에서 처음 만난 하이든은 그의 실력에 매료되었고, 제자로 받아준 이후 한동안은 그의 과제 실력에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의 실력에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하이든은 베토벤의 전 스승에게 베토벤의 실력과 이를 만들어준 그의 가르침에 대해 칭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하이든에게 돌아온 답장은 우리의 ‘파파 하이든’도 화나게 만들었다.


“하이든, 당신이 과제로 받은 작품은 다 제 밑에서 완성한 것들이에요.”


그 이후로 하이든은 베토벤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하이든 역시 베토벤을 제자로서 인정하지 않은 것뿐이지, 20대가 된 그의 연주 실력과 작곡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고 즉흥연주로 피아노 배틀이라도 시작하면 베토벤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이 되자 귀의 이명이 심해지더니 30세를 넘어서는 점점 청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원체 괴팍한 성격의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자 의심이 더 심해졌고, 그만큼 고집도 심해졌다. 베토벤 역시 자신의 청력 문제가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을 직감하였는지 그는 조용히 하일리겐슈타트(오스트리아 빈 주변의 작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베토벤은 자신의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죽으면’, ‘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등등 죽음을 암시하는 이 편지는 결국 전해지지 않았고, 유서와 같은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쓰인 결론은 이러했다.


주어진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신이 나에게 내린 사명에 따라 인류를 위해 창작을 할 것이다.


베토벤은 제멋대로이긴 했으나, 예술인의 소명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음악가였다. (약간 중2병스럽기도 하지만) 실제로 새로 태어난 듯한 베토벤은 교향곡 3번 <영웅>을 시작으로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빈을 향해 쳐들어올 때도 빈을 떠나지 않았다. 누누이 설명한 베토벤의 괴팍함과 고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당시에는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다 보니 많은 국민들이 국가 간의 전쟁을 자신의 일로 인식하지 않아서 피난을 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베토벤은 생각보다 계몽적이고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때문에 민주주의와 평등을 외치는 나폴레옹에게 베토벤은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교향곡 3번을 작곡한다. 작곡을 시작하기 전 베토벤은 악보 첫 장에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를 적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독재의 야망을 드러내자 그의 이름이 적힌 첫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훨씬 더 웅장하고 격렬한 음악을 작곡한 뒤 ‘Eroica’(영웅)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https://youtu.be/I9HapWc4mr4


그리고 이 시기의 베토벤은 여성들에게도 참 많이 까였다. 연주 실력이 출중하고 작곡 실력이 출중하여 많은 귀족 가문의 여인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참으로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고 끊임없이 구애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베토벤, 저는 당신의 음악은 사랑하지만 당신은 사랑할 수 없어요.”


하하, 내가 전 편에서 말한 거랑 똑같다.


실제로 베토벤의 행동이 워낙에 괴팍하다 보니 얼굴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여성은 자신이 피아노를 가르치는 귀족 집안의 여식들밖에 없었고, 베토벤의 신분도 네덜란드계의 평민이다 보니 마음이 맞더라도 만남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베토벤은 고집이 너무 심해서 자신이 사랑에 빠진다면 상대가 어떤 지위이건, 사회통념이 어떻든 간에 청혼을 하기도 했다.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나이 40살에 17살의 ‘테레제 말파티’에게 반해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을 바치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던 베토벤은 1년 뒤 18살의 테레제에게 구혼을 하는데, 애당초 말파티 집안은 베토벤을 단 한 번도 결혼 상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18살에 40살에게 청혼을 받았다면 경찰서에 갈 텐데 하하)


이것은 나의 추측이지만 베토벤은 귀족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이 ‘평민’이라는 것에 대해 약간의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고집스러운 성격에 계몽주의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발심을 가졌을 것이고, 아마 이런 자격지심이 무의식에 반영되어 아름다운 귀족 여성들만 골라서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 보기엔 약간 속이 매스꺼운 사랑 이야기지만 그만큼 로맨틱한 면모도 있었다. 그는 평생 ‘안토니 브렌타노’라는 여성의 초상을 간직하였는데, 바로 그녀가 현재 가장 유력한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다.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사랑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로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Immortal beloved, 1994, 개리 올드만 주연) 베토벤은 가끔 편지를 완성하고도 보내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앞선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 바로 이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이다. 그렇게나 제멋대로 굴면서도 힘든 시기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전하지 못할 편지를 썼다고 하니 약간은 마음이 짠해진다.


방금 말했듯이 로맨틱한 면모가 있는 베토벤은 편지에 자신의 진심을 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불멸의 연인이 안토니가 맞다면… 그는 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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