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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조금 정체되었을 때의 기억

지나가는 생각들

by Rumi


이십 대 중반, 가까운 친구들과 알고 지내던 또래의 다른 애들이 졸업 후 뉴욕 이곳 저곳에서 좋은 직장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때, 짧은 기간동안이었지만 저는 이런 저런 이유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지요. 맨해튼에 있는 SK글로벌이라는 한국회사에서 인턴을 조금 길게 한 것이 실수였고, 이 곳에서 하던 일이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early career track 의 흐름이 끊긴 셈이 된 것이었습니다. Finance 쪽에 있었어야 하는데, administration 쪽에서 일을 했으니, 채용 담당자들이 볼 때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은 선택이었지요.


조바심에 더해 약간의 패배감이 들기 시작한 가을, Chase Manhattan 의 regional call center 에 opening 이 있다는 hiring ad 를 보고 지원을 했습니다. 조금은 성급하게 banking 쪽으로 길을 바꾸기로 한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하지만 이 또한 banking career 를 시작하기엔 좋은 직장이 아니었음을 call center 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첫 날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Call center 라는 곳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CS 경험이 있으면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주로 Hispanic 이나 African American 여직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5년, 10년을 일하면서 승진도 하는 그런 곳이었지만 pay grade 가 맨해튼, 아니 Queens 보다도 한참 아래였던 단순업무의 반복인 곳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저는 manager position 이라 call 응대는 급할 때가 아니면 하지 않았지만, 이 곳에서 계속 있게 되면 dead end 가 될 것임은 뻔했습니다.


이 곳의 위치는 New York City 도 아닌, Wall Street 에서 두 시간 동쪽으로 떨어진 Nassau County 내 Jericho 라는 township 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하는 반대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통해 8기통 엔진을 단 중고 대형차 (Mercury Grand Marquis) 를 운전해서 이 곳에 가곤 했는데, career 마저 역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그다지 유쾌한 드라이빙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 곳은 참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직원들도 대부분 순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쉬는 시간이나 원하는 어느 때마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면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의 향과 꽃들의 화려함이 걷는 그 누구건간에 마음을 참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점심이면 집에서 만들어 온 sandwich 와 Coke 한 캔을 차 안에서 먹으며 radio station 에서 흘러나오는 pop music 을 듣고 따라부르기도 했지요. 가끔은 "그냥 이렇게 여기서 옥심없이 일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저를 유혹할 정도로 이 곳이 주는 안락함은 꽤 강렬했습니다. 가끔 야근을 할 때면 직원들과 십여개의 pizza 판을 주문해놓고 먹고 마시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며 간간히 걸려오는 고객문의 응대를 하던 기억이 남아 있지요.



최근에 이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30년이 거의 되어가는 지금, 놀랍게도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Chase Manhattan Call Center 는 이전하고 다른 회사가 들어와 있었지만 이 곳 인심이 좋아서인지 건물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게 해 주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더군요. 건물, 주변, 심지어 엘레베이터도 변한 것이 없는 이 곳 - 이 장소의 삶이 예전에 그랬듯 느리게 흘러가는 동안에 저는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질렀는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느끼는 이 곳의 느낌이, 30여년전 느꼈던 그 느낌,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여기서 옥심없이 일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다시 저를 유혹하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제 삶이 피곤해진 까닭이겠지요. 예전보다 물질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금이지만, 왠지 제 마음은 그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는 듯 합니다. 마치 그 예전 그 때, 역방향 고속도로를 타고 출근하며 느꼈던 불안감이 왠지 그리워짐은, 누군가가 제게 물어본다면 지금껏 제가 딱히 잘 살아왔다고 대답 할 수 없을 듯 하다는 생각과 같은 선상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그 때 이곳에서 눌러앉았다면 지금은 아마도 넉넉한 마음씨의 롱아일랜드 한인중년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Septembe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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