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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메어오는 기억의 공격

지나가는 생각들

by Rumi


머릿속에서 갑작스럽게 현실로 내던져지는 추억 조각들의 대부분은 마음까지 뒤흔들 정도로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나쁜 기억들의 경우 지금의 제 자신이 그 기억들을 일부러라도 억누르거나 다른 무엇인가에 관심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 기억들의 비수가 다시 제 마음 어딘가를 후벼대지 않게 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기억들의 경우 이들이 마음 속으로 어느 정도는 파고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하지만 이런 기억들 또한 마음 속에 너무 오래 두게 되면 나쁜 기억들같지는 않겠지만 이들도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더군요.


오늘은 나쁜 기억도 아니고 좋은 추억도 아닌 1989년 11월의 어느 겨울날의 기억이 살며시 찾아왔습니다. 거의 30년이 넘도록 기억속에 찾아오지 않았던 아주 평범했던 추억 - 하지만 이 소소한 기억이 하루 종일 마음속을 헤매고 다니는 바람에 마음이 매우 심란하기까지 합니다. 아픈 기억처럼 이곳저곳을 들추어놓을 정도군요.


이 추억, 지금처럼 Chinatown이 열대 밀림의 거미줄처럼 퍼져있기 전이었던 80년대 후반 Flushing이란 township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있던 작은 YWCA사무소의 기억입니다. High school 11학년생이었던 나는 사회봉사 credit 을 얻기 위해 방과 후 part time 일을 마친 후 늦은 오후 6시에 이 곳에 가서 이민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다양한 배경의 junior high school학생들에게 free tutoring (과외) 을 2시간동안 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런 사회봉사 credit 은 사회생활을 일찍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작은 조직이었지만 책임과 시간관리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3개월간의 경험이었습니다.


대략 30여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으러 오던 이 곳에서 다른 tutor 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마도 10학년이었던 교포여학생이 오늘은 제 기억을 놓지 않더군요. 이미 검정색 머리칼에 검정색 염색을 해서 the ultimate black hair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머리칼을 가지고 있던 여자애였고, 옷도, 그리고 manicure 도 검정색이었습니다. Elvira - Mistress of the Dark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온전한 2세 교포였지요.


이 여자애의 기억이 오늘은 계속 떠오릅니다. 겨울이었고, 지금의 겨울과는 달리 매서웠던 추위였지요. 눈까지 내리던 저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1984년 Oldsmobile Cutlass 를 타고 다녔던 때였고, 이 차는 겨울이면 "CHECK ENGINE"경고램프가 하루도 빠짐없이 껌벅거리던 그런 차였습니다. Tutoring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YWCA 바로 앞 길가에 세워두었던 이 차의 시동을 켜고 창문에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아내던 기억, 그리고 그 김이 지워진 창문을 통해 그 애가 마침 사무소를 걸어나오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집으로 데려다준다고 할까? 했던 생각도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 애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고, 저는 차 안에서 "CHECK ENGINE"경고램프가 일렁이는 계기판 너머 그 애를 멍 하니 바라보던 기억 -


오늘은 하루종일 내내 그 기억만 납니다. 이 곳에서 시작된 기억들이 이어지고 이어졌고, 지금은 목이 조금 메어 올 정도로 그 겨울이 그리워집니다.



- Novembe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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