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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Sep 02. 2021

"Chanel No. 5 (Final)"

결혼을 생각했던 한 사람과의 추억

(6/7 편에서 계속)


아영이와의 타임라인을 되살려보면 "어떻게 이런 관계가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서로를 알게 된 2003년, 그 후 2년간의 깊었지만 on-and-off 했던 연애,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남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과 제가 결정한 2005년의 작별과 그녀의 결혼, 그 후 2년이 지난 2007년에 받은 그녀로부터의 예상하지 못한 문자와 이를 통해 지난날들과 오해들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 하지만 이것으로 종결점을 찾았다는 생각이었지만 인연이 그때 끝나지는 않았더군요. 다시 만나게 된 때가 2013년 - 사실 이 때는 2005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후 8년 만에 다시 대면한 때였군요 - 그리고 서로가 바쁜 까닭에 잠시 멀어졌다가 또다시 만나게 된 2020년과 지금까지 어설프게 이어지는 인연.


2013년 4월, 우연한 기회로 그녀로부터 온 이메일로 인해 다시 연락이 닿은 우리 - 우리는 이 재회를 중앙극장 쪽 남산 언덕에 있는 작은 이탈리안 식당에서 가졌습니다. 온전히 업무로 만난 우리였지요. 아영이는 37살이 되었고 저는 41살이 된 때였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하나 있는 아영이는 얼굴에 지난 세월의 흔적이 보이더군요. 아직도 아니 예전보다 더 매력적인 모습이었습니다 - 20대 여성들이 가지지 못하는 매력이 30-40대 여성들에게는 느껴지지요. 그때 아영이의 첫 말이 이랬습니다:


"정원씨는 그대로네... 결혼을 안 해서 그런가? 아님 술, 담배, 여자를 전혀 안 경험해서 그런가요?"


제 답이 이랬었지요:


"골치 아픈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삶이라 그런가 봐... 생각 깊이 안 하면 잘 늙지 않는 거 같아."


"나, 많이 늙었지요?"

"아니어요, 매력 그대로네요. 이상한 의미 아니고."

"결혼 싱거워요. 안 해도 돼요. 정원씨가 부럽네."

"그건 확실해요. 결혼은 안 해도 된다는 말."

"갑자기 화난다... 이 삶 그냥 집어치울까봐."


그래도 아영이는 잘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도 잘 크고 있고, 집도 잘 건사하고 있으며, 외국계 보험사에서 좋은 위치에서 인정받고 일을 하고 있던 그녀였지요. MBA까지 마쳐가고 있고, 그대로만 가면 회사 내에서 더 높은 자리까지도 갈 수 있어 보였던 그때 그녀였습니다.


그 후 아영이와 세 번 더 만났었지요. "La Spara"라는 The Hyatt 건너편 식당에서, 그리고 사당동 어딘가에 있던 재래시장 내 떡볶이집에서. 첫 번째 만남은 업무 때문에 만났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적인 만남이라, 기혼자인 옛 애인과 이렇게 만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사이였고, 시간도 너무나 흘렀지만 마음속에는 아직 예전의 추억들과 좋은 감정은 남아있었습니다. 2013년 봄에 다시 만난 우리는 그 해 겨울까지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습니다. 철저히 낮시간에, 그리고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지만 오는 길과 가는 길은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런 것들에 대해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된 우리의 만남들이었지요.


2014년에는 아마도 제 삶에 있어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많이 사랑한 경험이 있던 해였습니다. 이때 아영이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주었지요.


2014년 겨울, 이런 문자를 교환한 기억이 있습니다:


정원: 고마왔어요! 맛있고 멋진 장소였어요. 마주하고 있을 동안엔 참 행복한 마음이었는데 아영씨 가는 모습을 보고 난 후부터 마음이 아프다는 느낌이 떠나질 않아요.  

아영: 허락하는 한 많이 자주 만나길 바래요. 왠지 모르지만 삶에 있어서 새로운 힘이 되네요. 바쁜 시간 고마워요. 추운데 목도리라도 사드릴걸.


이렇게 또 우리의 긴 작별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을 왕복하는 삶이라 바쁘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고, 아영이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한 삶을 살고 있어서, 당시 우리의 상황과 나이에는 그저 연락이 끊겨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지요. 2013년에는 눈도 꽤 왔던 기억이 있어서 그때를 회상하면 눈이 떠오르더군요. 지난 19년에 가까운 세월을 통해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에 걸쳐 작별할 때마다 나쁜 기억으로 마무리되었던 기억이 아닌, 흰 눈이 떠올려지는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그 후 2년 후 2020년에 그저 엊그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아영이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그녀는 자기 사업을 시작한 지가 몇 개월 되었고, 저는 크게 변하지 않았었지요. 양재동에서 오래간만에 만나서 아천천히 느린 속도로 점심을 같이 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우린 다시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납니다. 그녀의 사업 이야기, 그녀의 아이가 크는 이야기, 내 일 이야기 -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들. 하지만 예전 이야기나 추억 되새김은 하지 않습니다 - 아마도 우리의 추억은 꽤나 험한 길을 걸어왔기에 그리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에 대해 매우 미안해지는 이야기도 할 수도 있기에 아예 우린 암묵적으로 생각 속에서 이쪽으로는 가지 않기로 동의한 듯합니다.


작년 가을에는 아영이 사진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니 아영이는 바로 몇 장을 보내주었습니다. 잘 살펴보니 저와 다시 만난 2013년 봄, 2014년 겨울, 그리고 2020년에 다시 만났을 때 찍은 selfie 들이더군요. 각 사진에서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아영이는 우리가 재회한 그 날들 사진을 제게 일부러 보내준 것이더군요. 이 여자가 제게 가진 마음의 표시였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참 감사했습니다.


최근 들어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아영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 아쉽더군요. 슬프기도 합니다. 저와 살고 있다면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일까? 하는 소설 같은 생각도 했습니다. 예전보다는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다른 40대 중반의 여성들에 비하면 30대 후반처럼 보이는 외모입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그녀의 외모가 눈에 자꾸 걸리더군요.


지난날들같이 앞으로도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면 우린 또 곧 작별할 듯하고, 그리고 몇 년 후, 아 2025년쯤 다시 만날지도 모르며, 그리고 서로가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잘 사는지 듣고 보며 안도하고, 그리고 잠시 또 헤어지겠지요. 모를 일입니다.


아마 이게 우리만의 방식인지 - 하지만 15년 전과 같이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 영영 헤어지는 일은 없겠지요. 이렇게 우린 계속 인연을 이어갈 듯합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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