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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Dec 12. 2021

서울, 1978

Non-Fiction Series: #3


대문을 열고 나온 후 오른쪽으로 걸어 나오면 지금 보이는 길이 나왔다. 그때만 해도 꽤 넓게 느껴졌던 길이지만 지금 보면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었던 길이지만 6살짜리의 눈에는 꽤나 넓은 길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 길로 차가 다녔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마도 이 이유에서인가 아닌가 싶다.



길 끝에 보이는 교회는 이름은 같으나 내가 다녔던 그 교회는 아니다. 아마도 80년대 후반 예전 위치에서 이곳으로 이전을 한 듯한데, 원래의 장위 교회는 저 길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간 후 30미터를 걸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콘크리트로 만든 계단 4개를 올라가면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두 쪽의 나무 문으로 되어있던 교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간소하게 마련되어 있는 봉투함들과 주보 꽃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2층을 통해 3층에 있는 종탑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계단을 올라가서 종탑까지 올라가 본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그만 창 밖으로 내다본 동네의 풍경은 사실 근처 여느 집의 옥상에서 볼 수 있는 광경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였을 뿐, 상상의 그것과는 달라서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들리던 차임벨 소리의 잔잔한 찬송가 소리를 잠결에 들을 때면 그 무엇보다도 따스하고 평안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 또한 남아있다. 고작 6살이었지만 내가 지금도 느끼고 기억하는 그때는 모든 것들이 지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여유가 있었음을, 지금 그때를 기억할 때면 마음 한편이 아릴 정도로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자 마음속에 꼭꼭 새기곤 한다.


78년의 크리스마스는 이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2월 중순 어느 일요일에 유년 주일학교에 처음 나갔을 때 교회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나무와 교회 창문 등에 장식을 하느라 벌써 분주했고, 어린이들도 예배 후 모두 본당에 둘러앉아 종이로 만든 paper chain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색종이를 가위를 사용하여 고르게 자를 수 없는 10세 이하의 아이들이었기에 주일학교 선생님이 색종이를 길게 잘라주시면 우린 그것을 동그랗게 말아서 끝을 붙이는 일을 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색종이의 색감이 사실 참 촌스러웠고 질감도 좋지 않은, 그저 한국의 70년대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류의 문구였다. 풀도 왜 그렇게 많이 새어 나오던지, 손과 종이가 붙어서 애를 먹었던 기억 또한 있다. 그래도 그 착하고 착하던 우리들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화장실에 하나씩 데려가서 손을 닦아주시고, 예배당으로 다시 데려와서 다른 아이들과 즐겁게 종이를 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던 기억 또한 남아있다.


목사님과 사모님, 젊은 전도사님도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우리가 만든 장식들을 걸어놓기에 바쁘셨던 모습과, 교회 관리자인 어느 할아버지도 높은 사리에 올라가서 나무 위에 장식을 달던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성인이 된 후 나 또한 수년간 주일학교 선생님을 했었지만, 예전 그날들을 기억할 때마다 과연 우리는 지금 그때와 비교해서 얼마나 선한 마음과 숭고한 정신으로 교회 일에 임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저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생각만 남게 된다.


이렇게 일요일, 수요일,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반복하며 2주 동안 크리스마스까지의 기간 동안 교회 출석교인들이 열심히 봉사를 한 결과, 비록 종이와 싸구려 은박지와 금박지, 그리고 참 잘 꺼지던 전구들로 꾸며진 교회 안팎이었지만, 그래도 교회를 우리들의 손으로 꾸몄다는 사실에 마음이 참 따스해졌던 기억과,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축 성탄!"이라고 매직 마커로 큼지막하게 쓴 작은 봉지에 떡을 나누어주던 기억도 12월 25일이 다가와질수록 자주 내 마음속을 따스하게 해 준다.


이렇게 즐거운 추억이 교회를 통해 남아있지만, 집에 가면 우울하고 어두운 기운은 여전했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매일 밤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버지를 기다리시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늦은 밤 11시가 되면 어머니는 "아빠가 오늘도 일이 많으신가 보다. 우리 먼저 자자"라고 하시며 이불을 까시던 모습과, 불을 끄고 난 후 창문가에 서린 성에의 이런저런 모양들을 보면서 추운 밤 잠을 청하던 기억 또한 지금도 남아있다.



아버지는 외도는 끝이 났지만 방황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고, 잘못을 한 입장에서 그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집에 들어오시기가 불편하셨을 듯도 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와 누나에게 "아빠, 크리스마스에는 들어오시겠지?"라고 12월 24일 아침에 말씀하셨는데, 아마 어머니 마음속의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우리들에게도 이 말을 해 주시며 속으로는 기도를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캐럴송을 부르러 갈 일정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나와 누나와 집에 있기로 결정하셨다. 78년의 크리스마스가 우리 가족이 몇년만에 다시 함께하게 되는 크리스마스였기에, 혹시 아버지가 오시면 집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기에 집을 지키고자 하셨던 생각이셨나 보다. TV 도 없던 우리가 살던 셋방에는 라디오 방송을 틀고 있었고, 시계는 하염없이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왠지 평소처럼 밤 11시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10시에 아무 말 없이 이불을 펴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 "자자"라고 하시며 불을 끄고 우리를 자리에 눕혔다.


어제와 같이 창문에 서린 성에를 바라보며 잠이 들었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니가 우리를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부스스 일어나서 눈을 간신히 떠보니 아버지가 오셔서 우리를 보고 웃으며 앉아계셨고, 우리 머리맡에는 빨간색 선물 봉지로 포장을 한 선물 두 개가 누나의 머리맡과 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새벽 4시였던가, 교회의 종이 나지막이 울리기 시작했고, 우린 그저 아마도 산타할아버지가 주고 가신듯한 선물을 열어보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명확하게 남아있다. 누나는 그날 새벽 카라반 색연필 세트를, 그리고 나는 미니카 세트를 받았고, 우리 가족은 그 새벽 4시 반에 모두 같이 새벽예배를 참석한 후 이른 아침 반찬은 많이 없었지만 교회 사모님이 싸주신 반찬들과 국을 상에 올린 후 4명이 한 상에 둘러앉아 아침을 즐겁게 먹었던 기억이, 12월 중순이 면 아무리 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후엔 어김없이 목이 메어온다.



어머니에게는 76년부터 시작된 이후 3년간의 겨울이 참 춥고, 슬프고, 외로웠으며 고통스러우셨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1978년 크리스마스에는 오래간만에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78년의 겨울이 가장 소중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된다.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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