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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Mar 15. 2022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

지나가는 생각들


누군가 함께 했던 기억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이를 되살리려 아무리 노력을 하지만 아련한 안개처럼 뿌옇고 희미한 잔상으로만 떠오를 뿐 좀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추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이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오르기도 하지요. 세월이 갈수록 속절없이 지워지는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이런 축복의 순간들을 접하기란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지지만, 아마도 이러하기에 더 소중한 추억과의 갑작스러운 해후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 옛날 그 사람을 처음 본 그 순간 느꼈던 온몸이 마비된 듯했던 순간, 그리고 첫 약속 장소에서 너무도 느리게만 가는 시계를 바라보며 그 사람을 기다리며 느꼈던 주체할 수 없는 설렘처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기억의 조각들은 며칠간 삶에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더군요.




Holly에 대한 잊히지는 않은, 하지만 아마도 기억 속에서 파묻혀 있던 추억의 조각이 어제 마음속에서 떠올랐습니다. 비가 오래간만에 세게 내린 어제 오후, 삼성전자 본사 근처를 운전을 하며 지나가던 길에 택시를 잡기 위해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어느 백인 여성을 보게 되었고, 이 여성의 실루엣이 예전 Holly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 것이었지요.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길에서 보는 일이 예전보다는 잦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African heritage의 미국인이나 영국인을 보기는 평택에서는 어렵지 않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그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Caucasian heritage 도 만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주 간혹 책방에서 또는 샤핑몰에서 드물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본토'에 대한 왠지 모를 그리움에 말을 건네고도 싶지만 그리 하기엔 적절한 이유조차 없어서 시도하기도 어렵더군요. 한국에 거주하는 이들 대부분이 영어교육과 관련된 사람들이라 제가 만약 말을 건네고 대화가 이어지더라도 제가 희망하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것도 거의 확실하기에 시도를 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정장 차림의 백인 여성의 경우는 한국에서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 구체적으로는 Manhattan south에서 일상을 통해 대할 수 있었던 1990년대 또는 2000년대 New York corporate style의 여성이라고 할까요? - 지금처럼 노출이 지나치거나 색상이나 디자인이 현란하기만 했지 상황에 대한 conviction 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어울리지 않는 옷이 아닌, 20년 전만 해도 (남성도 그랬지만) 여성의 business attire는 당시만 해도 어떤 statement 였다는 생각입니다. 보수적인 정장을 입고, 아마도 이런 옷에 더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구두를 신었기에 부자연스럽지만 그 움직임에 있어 동작이 느리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움직임, 마치 Yves Saint Laurent 가 말했던 여성의 그 매력 - "여성의 아름다움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로 정의가 된다"며 "아름다움이란 '충격효과'이며 외모나 라인(몸매) 도 중요하겠지만 제스처(동작이나 자세)가 주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그 shock effect를 접하기는 한국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점점 더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Laurent의 이런 정의는 90년대까지 엄연히 존재했던 sexism에 토대를 둔 것이고, 세계 다양한 여성들과 인종들 중에서 콕 집어서 백인 여성들을 기준으로 한, 지금 2020년대에 적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70년대의 정의일 수도 있지만, 미국이나 여기나 지금은 business attire의 기준이 무너져버린 지 오래라는 주관적인 생각을 빗대 보면 그리 무모한 비판은 아닐 듯합니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접한 기억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달콤 쌉쌀한 dark chocolate의 맛에 비해볼까요?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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