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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pr 29. 2022

손에 잡힐 듯 아련한 날들

지나가는 생각들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Central Park 또는 그곳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부터 midtown (40가 근처) 사이가 주된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남쪽으로 수십 개의 거리들을 건너뛰어 위치한 Soho라는 지역도 자주 영화에 등장하며, 또 그곳에서 남쪽으로 열댓 개의 거리들을 건너뛰어 위치한 Wall Street 근처 또한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뉴욕을 접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외 지역의 배경이 영화에 자주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이와 같이 유명한 지역을 보여줍니다.


뉴욕다운 모습을 이런 곳들에서 접할 수 있음은 사실이나, 사실 이 도시의 진정한 멋은 이런 지역들이 아닌 다른 곳들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특히 82nd Street and above (East Side Manhattan)과 72nd Street and above (West Side Manhattan), 그리고 20 Street에서 NYU 사이의 동네들, 그리고 Wall Street 지역 중에서는 Water Street 근처 (Pace University 근처까지)를 즐깁니다. 한국에서 있을 때 밤하늘을 쳐다보며 떠올렸던 뉴욕의 기억도 이 지역들에서의 것들로 주로 채워졌지요.




이런 동네들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제 사랑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배경들 - midtown 50가에서 60가 주변, Wall Street, 그리고 소호 등 - 이 제게 있어서 참 중요한 장소들임은 확실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제 인생의 반쪽을 돌아보며 소위 "the glorious days"를 경험했던 곳들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준으로 볼 때 이런 장소들보다는 사랑의 추억이 배어있는 곳들을 더 아끼게 됨은, 아마도 삶이란 게 결국 사람으로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가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추억의 장소들입니다. 74가 & Amsterdam Avenue에 있는 deli grocery (이곳 salad bar 가 꽤 싸고 맛있습니다) 가게가 위치한 코너 횡단보도 블록에 금이 가 있는 것조차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며, 매년 가로등에 덧칠을 해 왔음에도 그래도 여전히 같은 색의 가로등이지요. 점차 light emitting diode (LED) 전구로 바뀌는 지금이지만 아직도 구형 신호등이 달려있는, 그런 장소들이 제가 아끼는 뉴욕의 장소들이지요. 다시 지어지거나 새로 올려진 건물도 없는 곳들이기에 봄날 오후의 햇살이 아파트 건물 사이로 내리쬐는 각도와 부드러움 또한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고, 건조하지만 대서양의 물기가 약간은 배어있는 듯한 공기 또한 같습니다. 4월 말에서 5월 초 Central Park 쪽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나무향 또한 조금씩 맡을 수 있지요.


이렇게 변하지 않고 추억의 배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곳들이지만, 정작 그곳들에는 저만 서 있고, 이 추억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상대들은 제 앞에 없습니다. 74가 Amsterdam Avenue 코너의 추억을 같이 만든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며, Upper East Side에 있던 큰아버지의 gallery 앞 거리에서 5월 정오가 지난 무렵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그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맨해튼 남쪽 Water Street 근처 추억의 대상도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한국에 있기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할 수 없으며, 설령 이곳에 있다 할지라도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엄마가 된 그 아이를 다시 불러내어 추억을 같이 회상하기엔 쉬운 현실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들과의 추억은 아직 이곳들에서는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젊었던 우리, 그리고 매일매일이 설레고 즐거웠던 우리들의 추억은 이 도시 이곳들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오래 남아있으리라 소망합니다. 아직까지는 제 기억의 그들은 마치 오늘처럼 생생하기에, 제가 변하지 않는 한 그들 또한 영원하겠지요.



은퇴를 준비하기 위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커리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생존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 충실한 사회적 동물이 되기 위한 노력들의 흔적들을 심지어 이곳 뉴욕에서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런 '치열함' 이 한국의 그것에 비하면 아직 그 정도가 비교할 대상도 아니나, 한국에서 느끼던 삶의 푸석푸석함이 여기도 적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그렇다고 뉴요커들의 삶이 그저 편하고, 느리거나 도전이 없는 곳은 절대 아닙니다 - "뉴욕에서 살아남으면 세계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듯, 여기는 전쟁터 가운데서도 최전방이지요.


하지만 한국에서 느끼는 전쟁과는 다른, 마치 전쟁터에서도 전우와 함께 간이로 만든 싸구려 커피를 마치 고급 커피인 양 마시며 야구 농담 또는 이런저런 잡담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할 수 있는 곳이 아직까지는 뉴욕입니다. 반면 한국에서의 느낌은 - 저만의 느낌인지는 모르나 - 집에서도 그리도 집 바깥에서도 계속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환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하다가 마시는 커피도, 점심도 그리고 저녁도 일의 한 부분일 뿐, 집에 와서도 나누는 대화조차도 결국은 일을 위해 또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이 점철되어야 하는 환경이 되어버린 생각입니다.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 라는 모토를 머릿속에 달고 살지만,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가 의문이 들 때가 많더군요.




과거가 살아있기에 뉴욕은 제가 사랑하는 도시이며, 저는 과거의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미래지향형 사람은 아니나 미래의 준비가 되어 있음은, 과거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기에, 다가올 날들에 대해 특별한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 누가 곧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까요? I doubt no one is, including myself.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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