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저 단순하게 누군가의 말을 듣는 일, 즉 'listen to'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만, 공감을 하거나 그 사람의 말속에 배어있는 속마음 -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등 - 을 동감 또는 공감하며 듣는 일, 즉 'hear'는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방송을 통해 접하는 talk show 나 variety show에서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몸짓과 표정 그리고 때로는 그 누군가의 말에 박수를 치고 또는 탄식하거나 탄성을 지르고, 심지어는 눈물도 보이며 공감하는 듯한 모습의 대화 상대는 왠지 지나쳐 보이고 믿음이 가지 않지요. 예전에는,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에까지만 해도 행여 이런 외적인 요소가 미미하거나 혹은 전혀 부재하더라도 상대의 말과 그 말속에 담긴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인맥을 의도하여 줄여나간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은 관계들은 그래도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르기에 소중히 여기고 지켜왔는데, 이 분들 중 많은 수가 예전 같지는 않지요.
씁쓸하지만 지금 현실세계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행위 (the act of hearing)를 그럴듯하게 연기하는 기술은 참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TV를 포함한 media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요. 하지만 진짜 (genuine article)와 가짜 (fake artist)를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치 고객 서비스 상담직원의 답변처럼 예측된 범위 내에 있는 적당한 내용의 정형화된 답을 내놓는 상대라면 진심과 가식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가짜들마저 자신들이 가식적인 답을 내놓은 것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꽤 높다는 것이겠지요. 그저 media에서 아니면 이런저런 강의나 책에서 보고 듣고 읽은 대로 수행한 것일 뿐, 그들을 가짜라고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act of hearing에 대한 예를 들겠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 계시는 어머니가 저녁시간에 제가 집에 돌아오면 마치 폭풍처럼 이런 저련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최근에는 요즘 들어 더 재미있게 활용하시는 태블릿을 통해 보거나 듣게 된 것을 제게 말씀해 주시지요. 제 관심사와는 상당히 먼 주제들이 대부분이기에 제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지요. 하지만 그저 당신의 말들을 듣는 척하며 가짜가 되어 듣고 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런 속임수는 옳지 않지요. 마치 어느 곳에서 테러와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 때 SNS 내에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solidarity movement 와 같은 천박한 것이니까요.
타인의 말을 듣는 행위보다 가족의 말을 듣는 일 (the act of hearing) 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그 상대를 수십 년간 또는 짧게는 몇 년간 보아온 것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또는 최근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 듣는 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반응을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이런 요소들을 반영한 후 왜 그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또는 불평이나 분노 (또는 화풀이마저)를 쏱아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만 노력하면 그 상대의 삶에 잠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는 상상을 하면, 듣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듣게 되고 가능한 한 상대를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작은 노력을 한 후 상대의 반응 (어머니의 반응)을 볼 때 상대 (어머니)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 때로는 약간, 그리고 때로는 강하게 - 만족감 또는 해소감을 느낄 때 저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쉴 수 있더군요.
타인의 말을 듣는 일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알고 지내지 않은 사람에 대한 듣기 (the act of hearing)는 어렵고, 이러한 경우에는 할 수 없이 평균에 가까운 일반적인 조언을 해 줄 수밖에 없지요. 다행히 그 사람이 처한 상태가 나의 지난 과거 어느 시점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할 경우에는 아주 적절한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지요. 가까이 지내온 사이가 아닌 경우,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단기적으로나마 연장하여 일종의 after service를 하며 관찰한 후 전보다 나은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합니다. 다만 그 상대가 그저 속마음을 one time event로 털어놓고자 제게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이런 수고는 괜한 것이 되고 무안해지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듣는 행위 (the act of hearing)를 하는 입장의 사람은 마치 스펀지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식당 식탁에 남은 지저분한 음식물들을 닦아내는 역할이나 아니면 이미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는 선반을 한 번 더 닦아주는 역할도 하는 경우 대부분에 있어 스펀지를 사용합니다. 물기가 많더라도 스펀지는 이를 흡수해 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저 다시 짜 내어 흐르는깨끗한 물에 헹구고 물기를 제거하면 거의 건조에 가까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닦아낸 것도 잠시 다시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이런 스펀지도 한계가 있지요. 어느 시점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오염의 정도가 회복이 불가능한 선을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 경우 표백제를 쓰는 방식으로 다시 깨끗하게 해야 하는 수고가 있고, 매 분 매 시간 사용되어야 하는 스펀지의 일정상 오염물을 닦아낼 시간이 없습니다. 듣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렇게 쌓인 오염물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주로 입니다만)을 마음속에서 그리고 생각 속에서 지워내야 하는데, 듣는 일이 많아질수록 이는 어려워집니다.
날이 갈수록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드물어집니다. 하소연이나 화풀이 또는 그저 하는 이야기들 - 이 모두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이지요 - 이런 것들을 듣는 사람들, 즉 다른 사람의 outlet 역할이 되어주는 사람들의 고뇌는 상당합니다. 이를 청소해 주어야 자신 및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데, 요즘에는 이럴 시간도 없어지고 그리고 좋은 말 vs. 나쁜 말을 듣게 되는 비율이 거의 1:9 가 되어가는 세상이라 스펀지는 매일같이 피곤하게 됩니다.
음악과 미술 등의 환경이 부족하지요. 양질의 서적도 접하기가 쉽지 않은 삶의 환경입니다. 종교기관도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고요. 서울의 경우 이 쪽 방면으로 모두 그리고 너무 부족해 보입니다. Amazon forest와 Africa 여러 곳에 우림지대가 존재해서 그나마 세상의 공기와 기후에 방어막이 되어주듯,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요소들이 도시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양질의 도서도 (고전서적) 이제는 많이 읽히지 않고 있고 그저 how to 류의 서적이나 stock trading 또는 leadership 개발 등의 '매일같이 푸시해대는' 강요적인 내용의 책들만 즐비합니다. 종교기관에 대해서는 이미 피력한 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이미지 없는 글을 쓰기는 처음이군요. 사실 글이란 게 이런 형태였는데, 어느덧 그림이나 사진 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빠지면 읽기가 지루해집니다. 이 또한 변해가는 세상이 만들어낸 쓰레기같은 byproduct 겠지요.
이렇게 써 내려가도 결국은 오늘도 즐겁게 sponge 삶을 살아갑니다. Godspeed, Samu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