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밖을 내다보니 전날 9 o'clock news에서 말한 대로 눈이 이미 적지 않게 쌓여있다. 온도는 18 °F으로 매우 춥고, 방 유리창에는 성에가 뽀얗게 서려있다. 창문 바로 아래 있는 육중한 증기 온열기만 아니었으면 꽤나 추웠을 지난밤이었으리라. 밤새 내내 쉭쉭 거리며 증기를 간간이 내뿜던 덕에 창문 중간 부분은 그래도 밖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성에가 녹아있었다. 앞에 보이는 개인주택들을 보며 저 집 사람들은 아마도 더 춥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달에 간신히 외운 Simon & Garfunkel의 The Boxer 가사가 떠오른다. "Then I'm laying out my winter clothes and wishing I was gone, going home, where the New York City winters aren't bleeding me... leading me, going home... " 5년 동안 잘 견딘 뉴욕의 겨울이지만 이번 겨울은 여태껏 경험한 12월 중 가장 추운 듯하다. 냉기와 바람이 매서운 나머지 살을 베어갈 듯한 날이 될 것을 생각하고 웬만해서는 입지 않으려던 오리털 롱코트를 꺼내어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The Alexander's라는 중하류급 백화점에서 산 것이라 더욱이 입기 싫었던 이 두툼하다 못해 몸 전체가 동그랗게 보이는 코트를 서서 내려보고 있자니 약간의 한숨도 나왔다. "이걸 입고 다니면 내 모양새는 어떨지... 알렉산더에 떼로 드나드는 인도계 이민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라는 생각도 잠깐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러고 보니 마치 이 노래 가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더 New Yorker 다워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역시 거리는 추웠다. 집을 나서기 전 TV를 통해 본 뉴스를 보이 이른 아침까지만 해도 눈이 많이 와서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지만 새벽에 제설차량이 차도의 눈을 길가로 잔뜩 밀어놓긴 해서 차들은 그래도 느리게나마 잘 굴러간다. 미국차는 대부분 후륜구동이라 조금이라도 가속을 하면 차의 엉덩이 쪽이 주르륵 미끄러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어 재미있기도 하다. 이렇게 차가 길 옆에 처박히게 되면 미국차들의 경우는 엔진이 커서 그런지 꽤나 큰 소리를 내며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결국은 그 괴물 같은 힘으로 대부분의 차들은 추운 아침의 곤란함을 피하게 되지만, 그대로 적지 않은 수의 미국산 차들은 제설차들이 길가로 밀어놓은 눈더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towing truck 이 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간간히 서 있는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서서 연신 전화를 어딘가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는데, 아마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출근을 못 하겠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눈 속에 차가 박혀버린 운전자인 듯하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머플러에서 한없이 뿜어 나오는 하얀 연기, 그리고 맨홀 구멍에서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증기를 흰 눈이 쌓인 거리를 배경으로 하여 보고 걸어가고 있으면 왠지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저 맨홀 아래는 따뜻할지, 그리고 간혹 자동차 머플러 뒤에서 나오는 흰 안개 또는 증기 같은 물질에 손을 대고 있으면 손이 잠시 따뜻해지기도 한데 - 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보행로는 보통 사람들이 "슈퍼"라고 부르는 아파트 관리인들이 미리미리 쓸어놓은 덕에 걷기에는 어렵지 않다. 눈길을 치우지 않고 누군가가 넘어지면 소송에 걸릴 건 뻔하기에, 그리고 아마도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눈이 오기 시작하면 아파트 관리인들은 꽤나 바빠지는 모습들을 자주 본다. 소송이 꽤 흔한 뉴욕인데, 지난 5년간 한 번도 난 넘어진 적이 없으니. Lottery를 해도 한 번도 적은 돈도 딴 적이 없으니 아마도 눈길 또는 빙판길에 넘어지더라도 million bucks 를 받아낼 수 있을지? 그리고 반을 변호사에게 떼어주고 세금까지 내면 남는 건 얼마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 역으로 발을 조심조심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