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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Dec 04. 2022

1980년대 뉴욕: 겨울 어느 날 #2

지나가는 생각들


Flushing. 이민자들의 보금자리다. 전통적인 주거지역인 Queens 지역을 관통하여 맨해튼의 중심까지 이어지는 7번 지하철의 종점이 바로 이 중간 크기의 도시인 Flushing이다. 예전에는 유럽계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폴란드계를 포함한 동유럽계 이민자들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는 백인들이 살았겠지만. 이후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한국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인디아에서 오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곳은 작은 한국이라고 할 만큼이나 한국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7번 지하철이 시작되는 Flushing 이 그렇지만 이 노선이 회차하는 맨해튼 42가 근처에 위치한 34가와 Broadway 가 만나는 지역 또한 많은 한인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시에서 아직까지는 정하지는 않았지만 Koreatown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즉, 이 7번 지하철은 뉴욕에 있는 두 개의 한인타운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Korea Express 일지도 모른다.



Union Street을 지나 Roosevelt Avenue에 다다른다. 나지막한 내리막길 왼쪽에는 Stern's라는 중상류급의 백화점이 있고, 오른쪽에는 잡화가게들이 많다. 작은 bagle 가게에는 아침이라 bagle과 coffee를 사서 출근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색, 회색 등 짙은 색상의 두터운 코트를 입고 서둘러 지하철 입구로 걸어가고 있다. 아직 눈길이라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조심스럽게 발들을 내딛고 있지만 꽤나 위태하게 보이는 사람들. 백인은 없다, 모두 이민자들인 듯하다. 전혀 비싼 옷도 아닌, 그저 두껍게만 입으면 되고, 하루를 추위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목적으로 입는 옷들이다. 모자도 투박한 것으로, 간혹 브로치 등의 액세서리가 꽂혀져 있는 것도 보지만 잘 보면 그저 싸구려 이미테이션이다. 맨해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곱고 예쁜 색상의, 보들보들한 고급 털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코트들은 여기서는 볼 수 없다. 옷이 날개인지, 아니면 어떤 옷이건 간에 피부와 머리칼이 하얗고 금발인 사람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지만, 백인들, 특히 백인 여성들이 맨해튼에서 멋진 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저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긴 하다.

 


며칠 전에 32가에서 싸게 산 워크맨이 지하철에서는 참 유용하게 쓰인다.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헤드폰을 쓰고, 플러그를 워크맨에 연결한 후 "PLAY"버튼을 누른다. 큰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26세의 백인 여성인 Holly 가 선물로 준 Simon & Garfunkel 카세트 테이프가 이 안에 들어있다. "I am a Rock"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둥 두둥 두루루 두루루 둥"으로 기타로 연주하는 전주가 시작된다 "A winter's day, in a deep and dark December, I am alone, gazing from my window to the streets below on a freshly fallen silent shroud of snow... I am a rock I am an island..." 오늘 날씨와 내 마음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노래다. 마치 전투를 준비하며 자세를 가다듬는 어린 병사처럼, 이 험한 뉴욕에서 십 대 중반의 소년이 세상의 심장부인 맨해튼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 준비를 하듯이 매일 아침 이 워크맨을 튼다. 1월까지는 방학이라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게 된 이번 12월은 내겐 새로운 도전이다. 



종점이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은지라 자리는 잡지 못하고 두 칸의 전철차량의 사이에 위치한 문 옆에 몸을 기대어 선다.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서로 간의 접촉은 없다.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이나 소설책을 손에 들고 읽고 있다. Danielle Steel이라는 작가의 책이 꽤나 많다. 커버는 꽤나 선정적이다. 아마도 연애소설인 듯. 서있는 사람들이나 앉아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계, 인도계, 또는 한국계들이다. 무표정의, 그리고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들이다. 중국계와 한국계는 구분을 할 수 없으나, 인도계 사람들은 꽤나 휘황찬란한 색의 스카프 같은 것을 두르고 있거나 목도리로 쓰고 있어서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이마 중간에 점 같은 것을 찍고 있는 여자들이 꽤나 많고, 이들의 체취도 다른 사람들과는 꽤나 다른, 어떤 약초향 같기도 하고 향을 피운 것이 그들의 옷에 밴 듯한 냄새 같기도 하다. 


전철은 Flushing을 떠나 Louis Armstrong 이 살았다는 Corona를 지나 Jackson Heights 쪽으로 달린다. 4번의 정차를 할 때마다 히스패닉계 사람들이 꽤나 많이 탄다. 이들은 한눈에 보더라도 불법 이민자들인 것이 확실해 보이고, 언제나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몸짓과 눈빛이 다르다. 여유가 없는 얼굴 표정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내 것과 비슷한 워크맨을 가지고 있고, 꾹 눌러쓴 헤드폰이지만 그들이 듣는 노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볼륨을 꽤나 높여놓은 듯하다. 삶이 고단한 것을 음악으로 해소하려는 것이거나 애써 삶의 고뇌를 잊으려는 몸짓같이 느껴진다. 신나고 흥이 나는 라틴대중음악들 - Hola! 등의 익숙한 단어들이 들리고, 배경 악기들은 자정을 넘겼지만 아직도 흥이 나는 파티장처럼 요란하다. 하지만 이들의 귀와 헤드폰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이 흥겨운 음악소리도 이 7번 지하철 객차 속의 다소 무겁고 춥고 정적인 공기를 이기지는 못한다. 여전히 하루 종일 수박을 나르고, 박스를 옮기고, 보석가공을 하거나 의류 가공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삶의 무게가 그 공기에서도 느껴진다.



이후 Woodside, Sunnyside 를 지나 내가 타고 있는 7번 전철은 Queensborough Plaza Station, 즉 맨해튼으로 진입 하기 전 Queens에서 마지막으로 정차하게 되는 역으로 다가가고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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