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생각들
59 Street과 Lexington Avenue 가 만나는 정차역은 맨해튼 uptown에서 downtown으로 내려가는 4번, 5번, 그리고 6번 지하철과, Queens에서 들어오는 N train과 R train 이 만나는 역이라 매우 바쁜 역이다. 오전 시간대에는 uptown으로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승객들이 downtown, 특히 Wall Street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4, 5, 그리고 6번 지하철은 모든 역에 정차하는 local line으로 달리지만 여러 역을 건너뛰는 express 도 이 역에 정차하기 때문에 더 붐비게 된다. 참 다양한 옷차림을 한 여러 국적과 인종이 이곳만큼 섞여있는 장소도 없을 것이다.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를 통해 59가와 Lexington Avenue 가 교차하는 곳으로 나오면 길 건너편에는 Bloomingdale's라는 고급 백화점이 보인다. 백화점이라고 하기엔 어느 호텔같이 보이는 것은 아마도 1층 정문 위로 여러 나라의 국기들이 걸려있기 때문이겠지. 한국 국기가 걸리는 날이 있으려나 하고 이번 겨울 동안 거의 매일같이 올려다보았지만 아직까지는 보질 못했다. 언젠가는 걸릴지? 하며 Christmas 가 몇 주 남지 않은지라 꽤 우아하게 장식이 된 쇼우 윈도로 눈길이 간다. 한국에서 보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리 반대편에 장식된 것들은 극도로 화려하고 고혹적이지만 우아하고 정말이지 uptown 스럽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주변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자동차들로부터 나는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몇십 초 정도지만 매료되게 된다.
여기서 파는 상품들은 Flushing에 있는 Alexander's에서 파는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싸겠지? 엄마가 이런 장식들을 참 좋아하시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기서 선물을 사서 드릴까? 1주에 250불을 버니까 미국에 와서 처음 하는 파트타임이지만 꽤 버는 편이라 그래도 여유는 되는데,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백화점이 문을 여는 시간은 30분이나 남아있다. 아무리 친척이지만 지켜야 할 것은 엄격히 요구하시는 큰아버지라, 8시 50분까지는 가게에 들어가서 유리창이라도 닦기 시작해야 한다. 점심시간 때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발길을 돌리지만 점심이 되면 이상하게도 이곳에 다시 와서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잊게 되고, 집에 가는 시간이 되어 59가와 Lexington Avenue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이르러서야 아차 하며 다시 떠오른 크리스마스 장식 생각. 백화점에 들어갈까 하지만 12월 뉴욕의 추위와 이에 따른 허기짐으로 인해 다시 내일로 미루게 된 지가 벌써 일주일 째다. 오늘은 꼭 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큰아버지의 가게로 발길을 돌린다.
두 블럭만 걸어가면 큰아버지의 펜 가게가 있다. 그 옆에는 유대인 형제가 운영하는 보석가게가 있는데, 그들 중 둘째는 대략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약간 다혈질인 성격의 곱슬머리를 한 사람이다. 아침인사 대신 "Did ya watch the Knick game last night (어제 뉴욕 닉스게임 봤냐)?" 로 물어보며 씩 웃는다. 전날 밤 닉스가 졌으면 오전 늦게가 되서야 가게 앞에 나와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다. 눈빛이 매섭고 평소에 그리 친근한 사람이 아니지만 The New York Knicks 이야기만 하면 매우 재미있어지는 사람이라 전날 밤 닉스가 이긴 날 다음날 오전에는 이 사람과 게임 이야기를 하며 가게의 바깥쪽 유리창을 Windex 를 뿌리고 청소를 하곤 한다. 커피를 다 마셨지만 게임 이야기를 하느라 이 사람은 내가 유리창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가게에 들어서면 털 스웨터를 입은 큰아버지가 이곳저곳을 다시 정리하시며 돋보기 안경 넘어로 눈인사를 하신다. 60년대 중반 대우그룹 지사발령으로 이곳에 오신 후 이제는 한국사람이라기보다는 진정한 뉴요커가 된 중년의 큰아버지는 연세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하시고 또한 수석으로 졸업한 분이다. 고가의 만년필을 사러 온 이 쪽 Upper East Side 부자손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 언제 나는 이 분같은 영어를 할까? 하는 생각이 매번 든다.
지난 가을에 큰아버지가 새로 고용한 직원 한 명, 26세의 백인여성 Holly Stoller 가 그의 옆에서 내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매일 아침 반긴다. 여느 미국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내가 흥미로운지 매번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고 가르쳐준다. 내게 이야기를 할 때면 부담이 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서 또는 상반신을 내 쪽으로 기울인 후 이야기를 하는 이 백인여성의 향기와 말소리가 내게는 매일같이 꿈같은 시간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속삭임은 그 무엇보다도 매력이 넘치고 언제나 들어도 싫지 않을 듯하다. 거기에 더해 매우 얇은 손가락과 뽀얀 살결은 십대 중반의 소년의 마음에는 큰 충격과도 같아서, 아마도 내 이런 긴장스러움(?)을 그녀도 알아챘는지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가끔은 내 얼굴을 보며 까르르 하며 웃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고 계시던 큰아버지는 좀처럼 웃는 얼굴을 하지 않으시지만 이 때만은 크게 웃으신다.
길고 색이 고운 코트를 입은 중년의 백인 여성이 나를 따라 가게에 들어선다. 가게의 첫 손님이다. Christmas 까지는 2주 남았지만 고급 만년필을 사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자신이 쓰려는 사람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세일 기간을 고대한 듯, 가끔은 가게 문을 여는 9시 전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12월의 두번째 주가 또 이렇게 시작된다. 학교에서 또는 친구들과 쓰는 영어와 이곳에서 쓰는 영어는 천지차이다. 오늘도 애써 고급스럽게 써야 하는 영어 때문에 긴장되는 하루가 되겠지만 점심에 Ray's Pizza 에서 먹을 점심과 오후 퇴근길에 들를 Bloomingdale's 생각으로 오늘도 또 들뜬 하루가 될 듯 하다.
- December 12,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