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제목으로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알려진 이 책은 꼭 읽어야 할 도서들 중 하나지요. 논란거리가 많았던 책이기도 하지만, 1970년 이후에는 이 책의 내용과 사용된 언어가 논란거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사회문화가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소설이 되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겠지요 (명작이나 영화로 만들었을 때 돈이 안 되는 작품).
이 책이 유명한 만큼이나 이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농담도 있지요: "The Catcher in the Rye"를 읽은 다음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읽었다고 둘러댄 사람들의 경우) 이렇게 답을 한다지요: "아, 주인공이 Rye를 잡은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에 소설화되기 전인 1945-46년에 부분적으로 연재된 J. D. 샐린저의 성장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지적이고 지각력이 뛰어나지만 깊은 고민에 빠진 열여섯 살 Holden Caulfield의 시점으로 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지요. 간략한 내용을 보면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3일 동안 뉴욕시 전역을 정처 없이 방황하는 Holden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주변 세계를 성찰하지요. 그는 어른들의 '어리석음'에 반기를 들고 더 단순하고 순수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그의 여정 속에서 자주 그리고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Holden이 기숙학교에 다니는 여동생 Phoebe를 방문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는 여동생에게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아이들을 구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요. 이는 어른들의 가혹한 현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Holden의 열망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Rye와 catcher로 표현된 Metaphor 지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청소년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묘사로 찬사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특히)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또한 직설적으로 강하고 폭력적인 언어와 성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비판이든지 변명이든지 부인한 것 인지건간에 당시에는 그랬답니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미국 문학의 고전임은 확실하며,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계속 읽고 즐기고 있지요.
한국의 십 대들과 미국 (뉴욕)의 십 대들을 가끔 비교합니다. 한국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졸업까지는 참 똑똑하고 표현력도 높은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들이 더 어렸던 시절 가지고 있던 그 좋은 quality 들을 암기공부에 다 써버리는 듯, 고 2 또는 고3정도 되는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고 있으면 정말이지 학교 관련 일들 (공부라고 하는 그 일)과 스마트폰 들여다보는데 영끌이라도 한 애들 같다는 생각이 짙게 들더군요.
아이들의 방황이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껴져야 하는데그렇지 않더군요.
하지만 사춘기 때 방황이라는 에너지는 어딘가에 소모되지 않는다면 속에 남아 썩어서 나중에 이상한 것으로 밖으로 나오게 되지요. 이 소설의 Holden 이 그려낸 방황의 흔적들 중 하나의 요소인 (어쩌면 지나칠 정도의) 비판적인 면도 없는 (아니면 속에 쌓아두고 있는) 요즘 애들은 그저 근거 없는 분노와 심지어는 고독감만 조금씩 마음속에 생각속에 키워가는 듯 보입니다 -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말이지요. 물론 지금의 40대와 50대들도 이런 감정은 있었지만 해소할 수 있는 channel 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독감이란 독소는 예전 십 대들에게서는 읽히지 않던 trait인데, 요즘 애들로부터는 조금만 말을 해 봐도 느껴지더군요.
사춘기라는 그 비밀스러운 방에서 키우는 분노 (anger) 또는 불만, 고독감, 그리고 불안감과 같은 요소들은 표출하지 않으면 이십 대 삽십대가 되어 예측 못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분출될 것이 뻔한데, 걱정이 많이 되더군요. 요즘 십 대와 이십 대들, 어색하고 서투르겠지만 사랑 또는 사랑의 행동은 할 줄 아는지도 의문입니다. 그저 비현실적인 모습의 남자 idol 가수들이나 어느 술집에나 어울릴 여자가수들의 모습만 접하고 있는 이들이 정상적인 sexuality를 가지고 있을지도 깊은 의문입니다 (미국의 아이들은 이곳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조금 양호하다고 할까, 하지만 거기서 거기지요. 다만 미국의 십 대들은 최근 10여 년간 다분히 종교에 관심이 높아졌다고는 합니다).
요즘 이십 대와 삼십 대들 일부가 보여주는 다소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보면 이런 것들의 산물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나이가 오십 대 전후인 분들은 십 대 시절에 좋아했던 (또는 유명했던) 가수들을 idol 이라고까지는 부르지 않았음을 기억하실 듯합니다. 기껏해야 일부 미치게 좋아했던 가수들로는 (단순한 예를 아래 사진으로 들자면) 가수 박남정 씨 또는 김완선 씨의 노래와 안무를 보고 들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몇몇은 따라 했던 정도였겠지요. 이 가수들이 요즘처럼 비현실적인 인형들처럼 보이는 것과는 달리, 80년대의 가수들은 우리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준건달(?) 또는 비행청소년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했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의 '우상'들은 relatable, 즉, 그저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우상 같지 않던 80년대의 그들, 그 흔함과 싼 티에 대한 이야기들을 미국에서도 '친구'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이를 글로 옮겨보면 - 어느 학교건간에 (여학교건 남학교건)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교실 맨 뒤에 앉아있는 4명 또는 5명 정도의 불량학생들이 있었다지요? 머리에는 학생주임에게 걸리지 않게 몸을 복도와 교실 사이에 있는 벽에 기대거나 낮추고, 머리카락은 무쓰나 스프레이 비슷한 것으로 좀 올린 상태로 건들건들 다리를 흔들며 입속에서는 뭔지 씹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미국가수 노래나 아니면 한국가요를 흥얼거리는 애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끔 침도 잘 뱉는 그런 애들을 TV에서 보면서 자란 40대와 50대지요. 저는 이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십 대 중반 한국아이들과 접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라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표현을 위에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쨌거나 특별할 게 없던 80년대의 '우상'들이었지요.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반항'의 상징들이 아니었나 합니다.
The Catcher in the Rye... 어쨌거나 어느 돈 많은 producer와 director 가 이 작품을 영화화할만한 용기가 있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