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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Mar 07. 2024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40

From Creation to Present


The Rothschild Era

고리대금업자

로스차일드의 시대 (4/4)

"이스라엘의 건국"




Preface

아래는 이스라엘의 수도 Tel Aviv의 거리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입니다. 거리의 이름은 Rothschild Boulevard, 즉, "로스차일드 대로"지요. 이스라엘의 건국에 거의 독자적인 공을 세운 Edmund Rothschild에 대한 감사와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미 mason으로, 그리고 일부는 Illuminati member 인 이 집안의 사람을 기린다는 의미지요. 이 기념비, 유대교적일까요? 또는 기독교인들이 볼 때 성스러운 것일까요?



아래 사진은 이스라엘의 대법원 건물의 전경입니다. Rothschild 집안이 주도하여 만든 건물이지요. '가증한'상징들로 가득한 건물입니다. All-Seeing Eye 가 위치한 피라미드 형상의 구조물이 이 건물 중심부 맨 위에 위치하고 있지요. 이 건물, 유대교적일까요? 또는 기독교인들이 볼 때 성스러운 것일까요?




1. 어찌 보면 기적인 이스라엘 건국

표면적으로 볼 때, 다시 강조하면 표면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그 속도와 규모에 있어 이처럼 극적이었고 기적 같은 일은 없었으리라 봅니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 바로 전까지도 수용소에서 6백만 명이 잿더미로 태워졌던 민족이었음에도, 이후 3년 남짓한 시간 후에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될 줄 누가 예상했었을까요? 이를 두고 (Nazism에 협조를 충실히 그리고 조용히 진행했던 Vatican의 의견은 모르겠지만) 신교 측에서는 the Old testament의 신명기 30:1-5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 (Gathering of Israel / Ingathering of the Jewish diaspora) - 즉,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모여 국가를 이룬다는 Bible의 예언이 또다시 현실로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1948년에 국가가 세워지면서 순식간에 진행된 이스라엘 민족의 디아스포라는 1897년부터 시작된 시오니즘 ideology를 굳건히 하고 현실로 이루어냈으며, 이후 바로 만들어진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1948년 독립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이스라엘로의 대규모 이주는 특히 과거 유대인이 Egypt로부터 빠져나온 사건, 즉, Exodus로 대변되는 사건에 비유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세대주의적 (dispensational)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국가건립과 1948년이라는 해는 구약의 The Book of Daniel 그리고 신약의 Book of Revelation 등에 언급된 말세와 심판의 날 (The Last Day: The Judgment Day)을 예측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이벤트와 날이 되었기도 합니다. AD 70년 이후 온전히 파괴된 한 국가가, 이후 거의 2000년이 지나 자의도 아닌 타인들에 의해 국가가 재건된 일은 유대교인 및 구교 및 신교도들에게는 유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임은 당연합니다. 창조주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견 및 해석이 지배적이지요.



2. 창조주에 있어 이스라엘은 도구일 뿐

이렇게 기적적인 이스라엘의 건국,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많은 의아함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하더군요. 그렇기에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 선택된 민족"이라 이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당연하다고 보기보다는, The Great Flood (대홍수) 이후 다시 시작된 인류역사는 Christian perspective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보다는 circa BC 2300에 발생한 두 갈래의 흐름이 큰 의미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가장 (아마도 유일하게 이것만이) 중요하다"



물론 이 나라와 민족은 Christian 들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교는 유대인 탄압의 주범이라 자격이 없지요). 하지만 이들 또한 창조주께서 "돌들을 들어서라도 (너희를 대신할) 민족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하실 정도로 추한 민족들이었으니, 이들에 대한 축복을 잘 못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이들 또한 big picture의 한 부분일 뿐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두 갈래의 흐름이란, 첫 바벨론제국의 황제이자 바벨탑을 세운 후 자신을 우상화한 Nimrod (니므롯)과 그의 여인이었던 Semiramis (세미라미스)로 시작된 한 가닥의 흐름 (우상종교)과, 이를 거부하고 이들로부터 등을 돌린 후 창조주를 선택한 Terah (테라)와 그의 아들 Abraham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흐름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고 the Holy Spirit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유대교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BC와 AD 가 갈라지는 시점에서의 이 두 번째 흐름은 더 크게 해석되어야겠지요.


요약하면 -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인류 역사는 결국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Lucifer와 fallen angels)과 결국은 이들을 eternal fire에 처리할 창조주 사이에 발생해 온 일로 명확히 큰 틀로 구분하고, 이스라엘은 그 한 부분을 차지하는 도구 또는 부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The Last Day와 관련된 해석을 할 때 이스라엘을 그 중심에 지나치게 두면 오판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해하였기에 이런 pretext를 드립니다.



3. 반유대주의의 시작

이스라엘의 건국은 속세적인 관점으로 볼 때 Anti-Semitism이라고 표현되는 반유대주의가 낳은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용어 semitic 은 18세기에서야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 흐름은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요. 반유대적인 구체적인 증거와 흔적은 3rd century BCE 경 Alexandria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이후 AD 4세기경 로마제국의 소위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부터는 더 노골적으로 증가했답니다. 이후 AD 10 세경 이 notion 이 유럽 전체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 유럽은 로마가톡릭의 온전한 장악이 마무리된 이후의 시기였고, 그렇기에 소위 Christian 아니라면 생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지요. 여기에 더해 유대교를 믿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사회계층의 하부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중 지금의 독일에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을 했는데, 이곳도 역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은 같았습니다. 1460년경 프랑크푸르트에는 ghetto라는 지역을 따로 마련하여 이들이 살게 했다지요. 도시 성곽의 가장자리에 깔린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이 이 도시의 ghetto의 모양새였다고 합니다. 이 동네를 Judengasse라고 했다고 합니다. 작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계곡과도 같은 모양이라 Jewish Valley라는 의미라고 하지요.



중세 유럽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금했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이 차츰 이쪽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지요. 이렇게 하여 아래 또 설명할 Rothschild 집안과 같은 '재정적으로 성공한' 유대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bottom feeder였던 유대인들이 돈을 쓸어 담는 것을 보고 좋아할 사람들은 없겠지요. 구세주 (메시아)를 죽인 민족이, 그렇기에 하부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돈은 엄청나게 쓸어 담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다른 이유들도 많았지만 이 두 가지 이유, (1) 메시아를 죽인 민족, 그리고 (2) 더러운 사업을 하는 사람들 -이라는 낙인에 반유대정서는 자연스럽게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과 러시아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4. 시온주의 (Zionism)의 시작: 1896-7년

십 수세기를 지나며 이어지고 또 그 정도가 강해진 반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이에 반응한 유대인들의 시온주의가 19세기 후반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요. 그저 속에서 꿈틀거리던 이 사상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때가 1880년경인데,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로 인해 이 사상이 구체화되었고 유대인들이 만든 모임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이 1897년 독일에서 (아니, 스위스에서) 설립된 Zionist Congress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시작된 지 거의 2000년이 지난 후에 그 틀을 가지게 된 시온주의는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의 국가 idealogy로, 시온주의자들에 따르면 유대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민족이며, 프랑스 국민에게 프랑스가, 중국인에게 중국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유대인은 조상의 고향인 이스라엘에서 그들만의 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성의 온전한 토대는 BC 950년경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지금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kingdom이었습니다. 이후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나라를 수차례 빼앗기게 되고, 그나마 이후 특정한 국가의 구조 없이 이어지다가 AD 70년경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과 제2차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럽 및 여러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영광스러운 시온땅으로의 귀환, 즉, "Return to Zion (시온으로 귀환)"이란 오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근거하여 19세기말 경 유럽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시온주의 (Zionism)" - 즉,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사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움직임에 초기 당시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세속적인 유대인 저널리스트 Theodor Herzl (테오도르 헤르츨)라는 사람이었지요. 1896년경 유대인 민족주의를 단순한 사상이 아닌 국제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인물입니다. 이 사람과 다음에 다룰 Rothschild 인물과의 연관성은 하단부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4. Rothschilds와 시온주의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본다면 시온주의도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 등과 같이), 그리고 이에 따른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도, 자본이 강하게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어느 non-유대인들이 이를 자기 자본으로 funding을 할 리가 없지요 -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는다는 보증이 없다면 말이지요. 자신의 민족을 대이동 시키는 일, 돈이 되는 사업이었을까요? 유대인 혈통인 Rothschild 집안이 이 이벤트에도 관여했고, 아마도 유일한 driving force였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1) 시온주의의 시작점(?): Meir Rothschild의 출생과 성공

어찌 보면 Rothschild 집안의 역사를 간단히 둘러보는 일이 되겠지만 그렇게 시작해야만 Zionism을 제대로 track 할 수 있기에 간단히 기술해 보겠습니다.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Jewish ghetto에서 Boyer라는 유대인 가정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Meir Anshel이었고, 어릴 때부터 예리한 사업 감각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소설가 John Grisham (존 그리샴) 은 그의 어린 시절을 두고 "남의 집 잔디를 깎아주고, 모든 일에 열심히며,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다음 날 16세에 새 픽업트럭을 현금으로 사는 동네 아이"로 묘사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그 당시 어린 Anshel에게 잔디 깎는 기계나 픽업트럭은 없었지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잘했던 일은 돈을 벌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었다는군요. 차후 그는 유럽과 영국이 여러 분쟁을 겪는 동안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 매우 능숙했고, 이후 귀족들과 왕족들과의 연을 맞대어 그들을 위한 private bank 역할을 하는 것을 통해 큰 자본을 축적했지요. 결국은 유럽 5개국에 지점을 둔 거대한 은행 제국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은행 로고인 붉은 방패의 이름을 따서 Rothschild라는 보다 '보편적인'(즉, 덜 유대적인) 이름을 채택하여 자신을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ghetto에서는 각 집에 이름을 다는 대신 (문패) 그 집이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지 알 수 있는 상징, 또는 그 집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간판처럼 걸어놓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를 만드는 집안은 아래 사진처럼 간판을 걸었고, 금을 다루던 집은 그 아래 사진처럼, 그리고 단순하게 집안을 상징하는 어떤 상징을 걸어놓던 집들은 맨 아래처럼 간판을 걸어놓았다지요. 바로 마지막 상징이 Rothschild, 즉, "붉은 방패"라는 의미의 집안이었다는군요.



2) Meir의 후계자들

1870년대 말, Meir Rothschild는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넘은 시점이었지만, 그의 가족은 영국과 프랑스 지사 모두 각국의 고위 금융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예: 현대 국채 개념의 채권발행을 처음 시작) 왕국 귀족, 영주, 남작 등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프랑스 지점은 창립자 Anshel의 아들인 유능한 James Rothschild 가 1868년 사망할 때까지 운영했으며, 그 후 그의 아들 Alphonse와 Gustav 가 그 직무를 이어받았는데, 이 둘은 "시온주의"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남동생 Edmund는 아주 깊은 관련이 있지요. 이들의 이름들은 역시 유대인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지요.



3) Edmund Rothschild의 애국심(?)

프랑스 로스차일드 제국 수장의 막내아들인 Edmund (또는 그가 항상 자랑스럽게 사용했던 유대인 이름인 Avraham Binyamin)는 가족 사업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습니다. 그 대신 그는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고 18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순수 예술과 와인 문화의 평온한 후원자로서 (단순히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재배자이자 제조자로서) 자신의 시간과 막대한 재산을 투자했지요.


1877년 그는 이탈리아 가문에서 온 먼 사촌과 함께 정착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Ada'라는 뜻의 'Adelheid'였는데, 이스라엘 북부 샤론과 남부 카르멜 지역의 와인 산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Sdelheid는 히브리어로 'Ada'였습니다.


4) Edmund에게 있어 시온주의의 동기가 된 사건

1881년 Russia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pogrom (대학살) 이 발발하자, Edmund는 서유럽의 다른 편안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 당시 중년에 접어든 Edmund는 삶의 진지한 목적을 찾기 위해 Zion supporting 집단에 합류하여 유대인 문제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향한 Anti-Semitism과 관련된)의 해결책으로 조상의 조국을 회복하자는 선언에 동참하고 서명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청원서와 선언문에 서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거액의 수표(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수표)에 서명할 수도 있었겠지요. 막대한 power 가 Zionism에 관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시온주의 이주 (알리야 "Aliya"라고 불리는 운동) 운동 당시 Edmund는 수많은 농장을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 세우게 됩니다. 이후 이어지는 계속된 Aliya에 단단한 토대가 되지요. 이들은 러시아에서 있었던 1881-82년의 대학살 이후, 그리고 1890년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법안이 통과된 이후 두 차례의 큰 급류에 휩싸였습니다. 첫 번째로 Turkey 당국은 이스라엘 땅 전체에 유대인의 존재를 확장하려는 이들의 노력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새로운 마을에 주택 건설을 금지한 결과, 이미 유럽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유대인 주민들은 가축을 위해 개조된 창고와 축사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답니다. 재미있던 점은 이런 유대인 정착민 중 상당수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에 대표부를 두고 현지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럽 강대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들 국가는 자국 국경 내의 유대인에게 항상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구실로 유대인을 기꺼이 지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용가치가 있던 것이었지요. 어쨌거나 지금의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 이주자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미 존재감이 없어졌고 심지어 부패하기까지 한 Ottoman Empire의 적대감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Edmund 남작의 자본력을 사용하는 구식 뇌물 수수방법이었지요. 결국 이 방법도 통하게 되어 유대인 정착민들의 초기 이주를 성공적으로 이룬 유일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Edmund Rothschild 남작은 형들처럼 위대한 금융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순진하고 몽환적인 히피도 아니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Edmond_James_de_Rothschild


이스라엘은 이 사람이 보여준 이스라엘 건국 초창기의 막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그를 지칭하기를 "The Baron Rothschild", "HaBaron" (lit. "The Baron"), or "Hanadiv Hayeduah" (lit. "The noble donator")라고 한답니다.



5. Zionist Congress 설립

1881년경,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로 인해 유럽의 유대인들은 본국으로의 귀환에 대해 의논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1897년 스위스에서 Zionist Congress를 설립하게 됩니다.


원래는 독일 뮌헨에서 열기로 되어있던 이 모임, 독일의 유대인들 대부분이 반대했답니다. 이유는:


"독일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험한 땅으로 가야 하나?"


였지요. 이것이 유럽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 생각이었고, 디아스포라는 결코 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Zionist Congress는 독일에서 열리지 못하고 Switzerland에서 열렸다고 하는군요. 이 모임에서 위에 언급한 Theodor Herzl 이 이 모임의 첫 president 가 되었답니다.




6. 반유대주의를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무참하도록 역이용한 Herzl

Herzl 은 괴이한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현대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의미로 인식되어 왔으며, 기적을 가져온 미스터리 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요. 지금의 이스라엘 총리인 네탄야후도 이런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https://mosaicmagazine.com/essay/israel-zionism/2021/01/the-mystery-of-theodor-herzl/):


"Herzl created something out of nothing.

He turned Zionism into a mass movement."


Out of nothing 은 아니었지요. Rothschild의 재정적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 자는 mason 이자 illuminati였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예수회적 일루미나티의 가입선서를 상기시켜 드리면:


"지금까지 너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고, 네 형제들 사이에서도 스파이가 되고,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신뢰하지 말라고 배웠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는 개혁자가 되고, 위그노들 사이에서는 위그노가 되고, 칼뱅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칼뱅주의자가 되고, 다른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신교인이 되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 그들의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까지 추구하고, 너의 본성에 있는 모든 격렬함으로 우리의 성스러운 종교와 교황을 비난하고, 심지어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이 될 정도로 낮아져서 교황의 충실한 병사로서 너의 교단의 이익을 위해 모든 정보를 모을 수 있도록 하라."


예수회적 일루미나티는 이 선서에 충실했습니다. 유대계였던 Herzl 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운 데 기여를 한 영웅으로 되어 있지만, 자는 마음속 다른 신은 섬기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많습니다. 아래 그가 한 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점점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 이때, 오히려 이 반유대주의가 우리의 계획 (이스라엘 민족의 대규모 귀환) 이 도움이 될 것이다. 반유대인 세력으로 하여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의 부 (wealth)를 압류하도록 유도해 보겠다." - 이게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격인 사람이 한 말입니다.



계속하여 보면 - "반유대주의자들이 우리를 도와 유럽의 유대인들을 향한 압박과 탄압을 강화하면 이들 반유대주의자들은 우리의 제일 좋은 친구가 되겠지." - Herzl의 말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이 아닌, 회칠한 무덤 같은 민족으로 전락했기에, 이런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modern 이스라엘에서는 성스러움을 찾을 수 없을 듯합니다. 유럽에서 중세기를 통해 이룬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유대인들의 우상이 되고, 여호와보다는 다른 데 관심을 둔 유대인들이라는 점 또한 구약 및 신약을 통해 반드시 생각하고 있어야 할 부분입니다.


어떻게 같은 민족을 탄압하며 민족을 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결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예수회의 강령을 잘도 따르던 자였습니다.


이 사람,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존재로 재평가받아야 할까요? 요한계시록 2장 9절과 3장 9절의 서머나와 필라델피아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탄의 회당 (그리스어: συναγωγή τοῦ Σατανᾶ, synagoge tou satana)을 언급하며, 각 경우에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자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집단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And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myrna write: These are the words of the first and the last, who was dead and came to life: I know your affliction and your poverty, even though you are rich. I know the slander on the part of those who say that they are Jews and are not, but are a synagogue of Satan. — Revelation 2:8–9


And 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Philadelphia write... "I know your works. Look, I have set before you an open door, which no one is able to shut. I know that you have but little power, and yet you have kept my word and have not denied my name. I will make those of the synagogue of Satan who say that they are Jews and are not, but are lying—I will make them come and bow down before your feet, and they will learn that I have loved you." — Revelation 3:7–9


이 두 구절에서 언급된 흥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Synagogue of Satan이라는 것인데, 결국 사탄의 종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이 부류에 속했던 자가 Herzl 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ynagogue_of_Satan


민족의 이동 (그 순수함이 있었건 아니 건간에) 이란 계획만을 위해 그 수혜자가 되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해 반유대주의자들을 이용해 이들을 박해한 후 이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되면 가진 것과 갈 곳이 없어지니 이들이 결국 이스라엘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대단한 악질이었지요. 결국은 Satan의 최종목표, 즉, 유대민족의 말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니, 맨 위에서 언급한 큰 두 갈래의 전쟁에서 루시퍼가 이기게 되는)을 도왔던 자들 중 이 사람도 하나였습니다.


즉, Satan의 창구였지요.



7. 나치즘과 협조한 Zionist Congress

Columbia University 교수인 Joseph Massad 가 알자지라에  기고한 글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 독립, 시온주의, 반유대주의 등에 대해 (아무래도) 아랍인의 관점에서 쓴 것인데, 내용 중 사실이 존재함을 확인하게 되어서 일부를 올려봅니다. 1897년에 설립되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유지된 Zionist Congress의 '성스럽지 않은 행위들'이 기술되어 있더군요. 간략하게 중요한 부분을 올려봅니다. 1945년 이후 Zionist Congress 가 행한 일들은 아래 기사의 영문본을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aljazeera.com/opinions/2012/12/24/zionism-anti-semitism-and-colonialism



Herzl and his followers insisted that it is the presence of Jews in gentile societies that caused anti-Semitism. Herzl put it thus in his foundational Zionist pamphlet Der Judenstaat: “The unfortunate Jews are now carrying the seeds of anti-Semitism into England; they have already introduced it into America. Sharing this diagnosis with anti-Semites, the Zionists called for the exit of Jews from gentile societies in order to “normalise” their “abnormal” situation, transforming them into a nation like other nations.(Herzl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방인 사회에 유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Herzl은 시온주의의 기초가 된 팸플릿 '유대 국가(Der Judenstaat)'에서 "불행한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의 씨앗을 영국으로 옮기고 있으며, 이미 미국에도 반유대주의를 옮겨놓았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판단을 반유대주의자들과 공유한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여 다른 국가와 같은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해 유럽의 국가들, 특히 독일에게 유대인을 기존 사회에서 퇴출시킬 것을 촉구했다)


State-sponsored anti-Semitism would prove most helpful to Zionism. Indeed, Zionist leaders consciously recognised that state anti-Semitism was essential to their colonial project. Herzl did not mince words about this. He would declare in his foundational pamphlet that “the Governments of all countries scourged by Anti-Semitism will be keenly interested in assisting us to obtain [the] sovereignty we want”; and indeed that not “only poor Jews” would contribute to an immigration fund for European Jews, “but also Christians who wanted to get rid of them”.

Herzl would conclude in his Diaries that “the anti-Semites will become our most dependable friends, the anti-Semitic countries our allies”. These were not slips or errors but indeed a long-term strategy that Zionism and Israel continue to deploy to this very day. (유럽에서 국가적으로 지지하는 반유대주의는 시오니즘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은 유럽국가의 반유대주의가 식민지 건설 프로젝트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Herzl은 이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창립 팸플릿에서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는 모든 국가의 정부는 우리가 원하는 주권을 획득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가난한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럽 유대인을 위한 이민 기금에 "그들을 없애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헤르츨은 일기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은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친구, 반유대주의 국가들은 우리의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는 실수나 실책이 아니라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계속 전개하고 있는 장기적인 전략이었다)


That Arthur Balfour was a well-known Protestant anti-Semite who in 1905 sponsored a bill (The Aliens Act) to prevent East European Jews fleeing pogroms from immigrating to England was not incidental to the fact that the Zionists rushed to court him, let alone to his own support of the Zionist project through the “Balfour Declaration”, which would reroute Jews away from England. (아서 발포가 1905년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는 동유럽 유대인을 막기 위한 법안(외국인법)을 후원한 유명한 개신교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시오니스트들이 그를 법정에 세운 것은 물론, 그가 '발포 선언'을 통해 시오니스트 프로젝트를 지지하여 유대인을 영국에서 몰아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When the Nazis took over power in Germany, the Zionists, sharing Herzl’s understanding that anti-Semitism is the ally of Zionism, were the only Jewish group who would collaborate with them. In fact, contra all other German Jews (and everyone else inside and outside Germany) who recognised Nazism as the Jews’ bitterest enemy, Zionism saw an opportunity to strengthen its colonisation of Palestine.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반유대주의가 시오니즘의 동맹이라는 Herzl의 이해를 공유한 시오니스트들은 나치와 협력했던 유일한 유대인 단체다. 사실 나치즘을 유대인의 가장 끔찍한 적으로 인식하는 다른 모든 독일 유대인 (그리고 독일 안팎의 모든 유대인)과 달리,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In 1933, Labour Zionism signed the Transfer “Ha’avara” Agreement with the Nazis, breaking the international boycott against the regime: Nazi Germany would compensate German Jews who emigrate to Palestine for their lost property by exporting German goods to the Zionists in the country thus breaking the boycott. Between 1933 and 1939, 60 percent of all capital invested in Jewish Palestine came from German Jewish money through the Transfer Agreement. Thus, Nazism was a boon to Zionism throughout the 1930s. (1933년 노동 시오니즘은 나치와 '하바라 (Transfer “Ha’avara”)' 이전 협정을 체결하여 나치 정권에 대한 국제적인 보이콧을 유일하게 위반한 집단이 되었다: 나치 독일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독일 유대인들이 독일 상품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수출함으로써 손실된 재산을 보상하는 방식으로 보이콧을 깼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유대인 팔레스타인에 투자된 전체 자본의 60%가 양도 협정을 통해 독일 유대인의 돈에서 나왔다. 따라서 나치즘은 1930년대 내내 시오니즘에 큰 도움이 되었다.)


In 1935, the German Zionist branch was the only political force that supported the Nazi Nuremberg Laws in the country, and was the only party still allowed to publish its own newspaper the Rundschau until after Kristallnacht in 1938. Nazi officials would visit Palestine as guests of the Zionists in 1934 and in 1937. In the latter year, it was none other than Adolf Eichmann and Herbert Hagen who arrived in the country. The two were taken by the Zionist envoy Feivel Polkes to Mount Carmel to visit a Jewish colonial-settlement. (1935년 독일에 있던 시온주의 지부는 나치의 뉘른베르크법 (the Nazi Nuremberg Laws)을 지지하는 유일한 정치 세력이었으며, 1938년 독일 통일 이후까지 자체 신문인 룬트샤우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었다. 나치 관리들은 1934년과 1937년에 시오니스트의 손님 자격으로 팔레스타인을 방문했고, 후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돌프 아이히만 (Eichmann)과 헤르베르트 하겐 (Hagen)이었다. 두 사람은 시온주의 특사 페이벨 폴크스의 안내로 유대인 식민지 정착촌을 방문하기 위해 카멜 산으로 가기도 했다).


Eichmann’s second arrival in the country in the early 60s to be tried and executed was indeed his second visit, something Israeli propaganda always forgets to mention. Yet Zionism would always claim that its collaboration with anti-Semitism was strategic, namely to save Jews.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기 위해 60년대 초에 이스라엘에 두 번째로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선전에서는 항상 언급하는 것을 왠지 잊어버린다. 하지만 시오니즘은 항상 반유대주의와의 협력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This however does not square with the facts that during Nazi rule, Jews from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were given priority by the Zionists over German Jews for immigration to Palestine. Indeed, two-thirds of German Jewish applicants to immigrate to Palestine were turned down by the Zionists, whose criteria for the ideal immigrant was a Jew’s commitment to Zionism, youth, good health, training, wealth, needed skills and knowledge of Hebrew. (그러나 이는 나치 통치 기간 동안 시온주의자들이 독일 유대인보다 영국과 미국 출신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이민 우선권을 부여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로 시오니스트들은 이상적인 이민자의 기준을 시오니즘에 대한 유대인의 헌신, 젊음, 건강, 훈련, 부, 필요한 기술 및 히브리어 지식으로 삼았는데, 독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 신청자 중 3분의 2가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거절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아마도 이들이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게 아닌가 싶다).


As state-sponsored anti-Semitism disappeared with the defeat of the Nazis and the horrors of the Nazi holocaust became known, Zionists sought to conceal much of their history of collaboration with anti-Semitic movements and regimes. Yet the disappearance of state anti-Semitism created a dilemma for the Zionist project (나치의 패배로 국가가 후원하는 반유대주의가 사라지고 나치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시오니스트들은 반유대주의 운동 및 정권과 협력한 많은 역사를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유럽국가들 내에서 반유대주의가 사라지면서 시오니스트 프로젝트에 딜레마가 생겼다.)


If Zionism considers itself a response to anti-Semitic threats against Jews, with the end of state anti-Semitism Zionism’s raison d’être would be in jeopardy, as Jews would not be convinced of the need to move to the new state of Israel. Moreover, as anti-Semitism came to be rejected by the post-World War II world, so was colonialism. As the colonial age was ending and a post-colonial world of independent states was emerging, colonialism like anti-Semitism was thoroughly delegitimised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in European parlance. (시오니즘이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면, 반유대주의가 종식되면 유대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로 이주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오니즘의 존재 이유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스라엘 정착운동, 즉 식민주의 또한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독립 국가로 구성된 탈식민지 세계가 등장하면서 반유대주의와 같은 식민주의는 국제 관계와 유럽의 용어로 철저하게 위계화되었다.)



8. 그렇다면 Edmund Rothschild는 Herzl에 동의했을까?

모르는 일이지요. 다만 Edmund는 Herzl의 독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정착지를 만든 사람이다. 내 계획을 시온주의 정부나 어느 집단도 내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없다"


어느 시점에서 Herzl 은 Edmund를 자신들의 계획에서 따로 분리하게 됩니다. 아마도 Nazism 과의 동침 직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 이전에 이미 Herzl의 악함을 Edmund 가 파악한 나머지 Herzl 이 Edmund를 자신들의 계획에 직접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하바라 (Transfer “Ha’avara”)' 이전 협정을 통해 독일 내 Edmund의 자본이 다시 이스라엘로 이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내 반유대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에서 Rothschild 집안은 그 나라 내에서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자산을 몰수당했다고 합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 뿐, 모를 일이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Edmund Rothschild 가 팔레스타인에 세운 초기 식민지 (유대인 이주자들을 위한 지역) 덕분에, 그리고 Herzl 과의 연관과는 달리 계속된 Rothschild 집안의 디아스포라 지원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지금까지  Edmund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Rothschild 집안은 Satan의 synagogue이며, mason 들이며, 일루미나티에 속한 집단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건국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되지요.


이들이 Satan의 synagogue이며, mason 들이며, 일루미나티에 속한 집단이라는 증거는 다음 에피소드인 "이스라엘의 국기와 대법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9. 사적인 견해

창조주에 의해 4000년 전에 선택된 민족이 겪은 모든 일들은 직접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신의 통제 또는 간섭이 있어왔다고 보는 것이 protestant 들의 자세입니다. 결국은 우리 관점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니므롯의 후예와 아브라함의 후예 간의 전쟁이라는 배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애틋한 마음으로 변치 않는 지지를 해 왔지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


다만 문제는 - 이렇게 진행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Mason 들, 예수회적인 일루미나티 멤버들, 독일 Nazi 집단 및 반유대인주의의 도움을 크게 받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지요. 자신들이 모세 5경을 따르고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집단이, 그리고 지난 4000여 년 동안 신의 도움이 없이 존재할 수 없었던 민족이, 이렇게 국가를 설립하게 된 과정에 대해 가지게 되는 큰 의문점 몇 가지는 꽤 오래 제게 남아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으로 이해할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에수님의 오심을 계기로 구약 예레미야서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disconnection 이 있다고 봐야 할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I gave faithless Israel her certificate of divorce and sent her away because of all her adulteries.... Because Israel’s immorality mattered so little to her, she defiled the land and committed adultery with stone and wood. In spite of all this, her unfaithful sister Judah did not return to me with all her heart, but only in pretense” (Jeremiah 3:8–10).


인간의 자본으로, 민족을 가학적으로 속이는 방식으로 이룬 이 국가, 그리고 이를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현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많은 실망을 가지게 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수백 차례는 읽었던 이스라엘의 악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민족을 지켜준 창조주를 바라보면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을 radar 안에 꼭 두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나라의 건국에 있어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이었는지는 제가 알 길도 없습니다. 한 회사의 회장 마음도 모르건만 신의 마음을 알 수 없지요. 안다면 희대의 사기꾼이겠습니다.


그렇기에 서두에 올렸던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 선택된 민족"이기에 이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당연하다고 보기보다는, The Great Flood (대홍수) 이후 다시 시작된 인류역사는 Christian perspective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보다는 circa BC 2300에 발생한 두 갈래의 흐름이 큰 의미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가장 (아마도 유일하게 이것만이) 중요하다"





- March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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