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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4. 2024

책 읽기를 좋아하는 어떤 인간에 대한 소고


살면서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나의 경우 특별히 책에 대한 애착이 커서 좁은 집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책들이다. 우리나라의 지성 이어령 선생은 서가에 꽂힌 책들을 다 읽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제일 두렵다고 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은 귀해서 버리지 못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언젠가 읽을 그날을 위해 모셔두고 있으니 어떻게 서가를 비우겠는가.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일차적으로 한 일도 서가를 마련해 넘치는 책들을 시골로 옮기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던 책들이 이젠 시골에 방류되어 나를 기다린다. 그런데도 밀물이 차 오르듯 서가에 빼곡히 책들이 쌓이고 금세 서가는 비명을 올린다.    

 

나는 책을 즐겨 읽는 부류의 사람에 속한다.

그런 경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싹이 보였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뛰놀 때도 나는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마당이 꽤 넓었었다. 방학이면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몰려와 땅따먹기나 자치기, 술래잡기 놀이를 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그래도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책을 한가득 쌓아놓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옛날이야기 책에 심취하여 책 속에 들어있는 진기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면, 고학년 시절에는 중국무협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어서 무협지를 여남은 권씩 쌓아놓고 읽었다.

무협지의 제목은 달라도 내용은 대개 대동소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억울하게 부모를 여의고 버려진 주인공이 스승을 만나 비법의 검술을 익힌 후 장대하게 원수를 무찌른다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뻔한 스토리가 그때는 어쩌면 그리도 재미있었던지 지금도 그때의 흥분이 기억될 정도이다. 당시에는 책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던 지라 학교 도서관이 나의 보물 상자 역할을 해주었었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나는 다시 책의 보고로 달려갔다. 아예 도서반 활동을 하면서 초등학교와는 비교되지 않는 규모의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힌 자질 탓인지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친구들 보다는 약간 나았던가 보았다.

당시에 ‘고전 읽기 경시대회’가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나는 줄곧 지역 예선에 선발되어 서울로 시험을 치러 다녔다. 자연히 국어과목의 성적이 좋았고 국어 선생님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총각 국어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의 눈에 내가 문학적 자질이 약간 있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불러 개인지도를 하셨다. 아침에 한 시간씩 일찍 도서관에 나가 선생님께서 부여한 숙제를 점검받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시나, 소설, 에세이 같은 과업을 숙제로 내셨다.

당시 나는 사춘기 소녀였던지라 건방을 떠느라고 의미도 모르는 괴테와 헤르만 헤세 작품에 빠져있었다. <데미안>을 읽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싯달타>나 <유리알의 유희> 같은 작품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지나친 수준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독서지도에도 적극 나섰다. 내게서 헤세 작품을 빼앗고 <백조의 호수>나 <소녀의 꿈> 같은 내 나이에 어울리는 말랑말랑한 책들을 추천하셨다. 나는 당시 그런 작품들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총각선생님이 나를 특별히 불러 보여주신 관심에 완전 반해 그 총각선생님이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어느덧 일흔이 된 나는 돋보기에 의지해 여전히 책을 읽는다.

머리맡에는 대개 읽다 말거나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 있다. 책이 많이 쌓이면 나 스스로 부담이 되어 한 번씩 서가로 보내어 머리맡을 가벼이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서가로 돌려보낸 책이 단테의 <신곡>이다. 일본인 교수가 쓴 단테의 <신곡 주해서>를 읽다가 <신곡> 자체가 궁금하여 서가에서 다시 <천국>, <연옥>, <지옥> 편을 꺼내 왔던 것이었다. 확실히 주해서를 읽고 <신곡>을 다시 읽으니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곡>은 어려웠다.

지금 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파스칼의 <팡세>, 그리고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에세이집이다. 모두 건성으로 읽을 수 없는 책들이라 몇 번을 곱씹어보느라고 읽는데 시간이 걸린다. 언제 머리맡에서 교체될지 기약할  수 없다.


예전에는 책 속의 이야기에 빠졌다면 지금은 다양한 정보를 주는 책들을 즐겨 읽는다. 과학지식에 관한 책, 역사 서적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특별한 인물들의 평전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특별한 인물들이라고 하면 쉽게 위인전을 생각하겠지만 지금 내가 흥미로워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위인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 끈질기게 노력하여 인류 역사의 진보에 앞장선 그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감동이 된다.      

 인류 역사를 바꾼 인물들을 보면 대개 독서광들이 많다. 그것은 지식 없이 사상의 집을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단한 사상의 기반이 없이 이리저리 하는 행동은 그저 산만한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자녀를 키우며 자녀에게 기대를 가지는 부모치고 자녀가 독서를 많이 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관찰에 의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책을 읽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다.”         


“왜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은 책을 읽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또 다른 의문이다.

일본인 다치바나 아키라가 쓴 책 < 말해서는 안 되는 너무 잔혹한 진실>이 떠오른다. 그는 인간행동의 대부분을 그 자신에 내장된 DNA로 해석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책 읽기로 되어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저절로 책을 좋아하여 일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지만, 책과 인연이 영 없는 사람들은 어릴 때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책을 손에 잡았다 하더라도 성장하고 난 뒤에는 책과 이별을 고하고 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이 세상의 사람을 책 읽는 사람과 책 안 읽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 있다.

“책 읽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라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샌님처럼 골방에 앉아(요즈음은 도서관이지만) 책 읽는 사람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기질적으로 외향적이어서 바깥활동에 더 취미가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대통령은 “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은 책 두 권을 읽은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책 속에 길이 있다”라고 하면서 책 읽기를 독려당하면서 살아왔다. 거기에는 다 오랜 세월의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책 읽기를 유전자에 새겨진 성향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자 습관이 더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습관이 사람을 바꾸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몸에 붙여볼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칼 마르크스는 비참한 가난과 그로 인한 굴욕 속에서 살면서도 틈날 때마다 가족들에게 시, 소설, 문학작품 가운데 좋은 부분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책 읽기가 유전자에 새겨진 성향이 아니라면 습관을 바꾸어 자기의 부류를 양화 쪽으로 고쳐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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