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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6. 2024

아직도 가야 할 길

넘어지고 보니

    

냉장고 위의 물건을 내리려고 의자 위에 올라갔다가 몸의 균형을 잃었다. 의자가 옆으로 기울면서 내 몸이 부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천천히 일어난 일인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건넛방에 있던 남편이 뛰어왔다. 


부엌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고관절을 깬 친구 얼굴이 스쳤고 운동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친구 얼굴도 떠올랐으며 무단이 길 가다가 다리를 접질려 깁스한 친구 이야기도 떠올랐다. 순식간에 떠오른 생각들이었다. 


“야 이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구나 ”

하는 낭패감이 몰려왔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서 일어나다가 깨진 의자의 가장자리에 손가락이 닿으면서 피가 났다. 언뜻 보니 의자 다리가 날카롭게 부서져 있었다. 피가 많이 난 것도 아니었건만, 피를 보자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오래 사용한 가구이기는 했지만 이 의자는 단단하기로 이름난 장미목으로 만든 것이었다. 장미목 의자가 나의 체중과 쓰러지는 충격을 못 이겨 깨졌다고 생각하니 더욱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사고 며칠 뒤 딸아이에게 무슨 무용담을 전하듯 나의 사고 이야기를 떠들었더니 딸이 

“냉장고 위에는 위스키밖에 없지 않아? 와인셀러에 와인 떨어졌어? 거긴 왜 올라갔어?”

하며 의아해하였다. 딸아이의 말처럼 나는 냉장고 위에 올려져 있던 발렌타인 술을 꺼내려고 하였었다. 나의 의도가 드러난 듯한 민망한 마음에 

“응, 딸이 없으니 허전하여 진한 술 한잔을 하려고 했지!” 

하며 멀리 살고 있는 딸을 빙자하였다. 

만일 술병과 함께 넘어졌다가 술병이 깨지기라도 했더라면 어찌 됐을까를 생각하니 더욱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술병을 내리기 전에 넘어졌다.   

   

몸을 일으키고 보니 여기저기가 아팠다. 가장 눈에 띄는 부위는 오른쪽 허벅지 쪽의 타박상이었다. 피부 껍질이 벗겨지고 꽤 넓은 부위에 멍이 들었다. 양쪽 손목인대도 충격을 받은 듯 아팠고 의자 모서리에 박은 갈비뼈도 아팠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별 탈이 없었다. 

넘어진 그날은 약속이 있어 쩔뚝거리며 약속 장소에 다녀왔고 그다음 날은 갈비뼈 쪽이 아파 요가를 쉬었다. 사흗날에,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멀쩡히 걸어서 병원을 찾은 나를 보고 의사는

“제 발로 걸어온 것을 보니 뼈에 이상은 없는 것 같네요?”

라고 하였고 실제  나의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심하게 내동댕이쳐졌었는데 나는 왜 말짱할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짱한 원인을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첫 번째 꼽은 요인은 요가였다. 몇 년째 꾸준히 하는 요가 때문에 유연함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추론을 듣고 요가 선생이 매우 기뻐하였다.

두 번째 요인으로 꼽은 것이 나의 우유 취향이었다. 나는 우유를 좋아하여 하루에 3~400cc 정도의 우유는 족히 마신다. 공복에 우유 한잔, 우유에 바나나, 마, 사과를 넣고 갈아 마시고, 커피도 라테로 해서 먹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골밀도가 낮은 값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세 번째 요인에 더욱 마음이 간다. 

남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나는 ‘주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하필 의자 위에 올라가서 냉장고 위의 발렌타인을 꺼내 마실 생각을 한 것을 주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넘어지는 그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순간, 나는 마치 나를 떠받쳐 주는 것 같은 손길을 느꼈다. 내가 부서지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스캇 팩이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다시 꺼내 읽었다. 

스캇 팩은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그도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처럼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인간을 병들게 하는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핵심은 심리적인 내적 갈등의 존재를 찾아내어 그 갈등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표면으로 끌어올리는데 있다고 한다. 스캇 팩은 내적 갈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어린 시절의 애정결핍이라고 보았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환자의 정신병을 야기한 애정결핍이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환자가 깨닫도록 하고 영적 성장을 통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스캇 팩은 엉뚱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릴 때 애정결핍이 있었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 틀림없이 정신질환을 앓아야만 할 많은 사람들이 밝고 건실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그는 어떻게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이겨내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가에 대해서 더 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그 힘이 최악의 환경에 처한 대다수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지키고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보았고 그 힘은 하늘이 주는 ‘은총’ 때문임을 알았다. 

스캇 팩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 하느님의 은총은 비처럼 모든 사람 위에 쏟아지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 예로 우리는 쉽게 병에 걸리지도 않고 쉽게 죽지도 않는다. 스캇 팩은 사람들이 어떤 병에 걸리는 것보다 오히려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놀랍다고 생각한다. 스캇 팩의 예지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실제로 일어난 사고보다 일어날 뻔한 사고가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스캇 팩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도 나의 사고 때문이었다. 우연히도 술병을 꺼내기 전에 나는 넘어졌고 의자가 깨졌는데도 그 깨진 날카로운 부분이 나의 내장을 찌르지도 않았고 의자에 가슴이 부딪혔건만 갈비뼈도 말짱하였고 쓰러지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짚은 손목의 인대도 약간의 통증만 남긴 채 말짱하였다.  무엇보다 고관절이 깨진 것도 아니었고 무릎뼈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누군가 나를 살포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깁스를 온몸에 감고 있을지도 모르고 손목이 아파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캇 팩의 통찰에 의하면 모든 사람 위에 공평히 내리는 은총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은총을 거부하고,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산다고 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을 향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스캇 팩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고 하였다. 

한 인간의 영적 성장은 평생에 걸쳐 도달해야 하는 머나먼 길이라고 스캇 팩은 말한다. 

나는 삶에서 만난 작은 사고를 통해 나를 포근히 안아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의 대열에 서려고 한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은 영적 성장을 위해 아직도 가야 할 그 길을 묵묵히 걸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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