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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y 22. 2024

비파 아세요?

사랑하는 이를 위한 헌신


집 앞에 커다란 비파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언제 꽃이 피었는지 몰랐는데 초봄이 되자 나무에 어린 비파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비파가 노랗게 익었다. 비파 열매는 동전크기만 하여 크지는 않았지만 익어가면서 황금색으로 변하여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지만 비파를 먹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

비파와의 인연이라고 하면 재직시절,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자기들이 특화하려고 하는 비파 잎 차에 대해 나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 지방은 비파나무를 특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 처음 비파 잎 차를 마셔보았다. 커피에 익은 입에는 비파 잎 차가 특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냥 풀 맛이 났다. 그때도 비파라는 과일은 관심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익은 비파 열매는 기가 막히게 멋진 황금색으로 변했다. 손 닿는 곳에 있는 비파를 따서 먹어보았다. 작은 열매에 씨앗이 서너 개나 꽉 들어차 있어 과일로서의 매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었는데 신맛 쪽이 더 강해 살구와 비슷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비파는 가끔 새들이 와서 입을 댈 뿐 그냥 나무에서 황금빛으로 익어갔다.




하루는 젊잖하게 생긴 노인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노인은 내게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코리언인 내가 어떻게 중국말까지나 하겠는가!

그러자 노인은 영어로 저 비파를 좀 따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쓸모없이 홀로 익어가는 비파가 안타까웠던 나였던지라 노인에게 비파를 원하는 만치 따가라고 했다.

노인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파를 주워 껍질을 벗기더니 먹어보았다. 정말로 비파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익은 정도를 보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 얼굴이 환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진짜 비파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있자 우리 집 앞에 트럭 한 대가 도착하더니 엄청 큰 사다리가 내려왔다.

노인과 딸로 보이는 여인이 나타나서 비파를 따기 시작하였다. 노인이 사다리에 올라가 비파를 따고 사다리 아래의 여인은 위를 쳐다보며 중국말로 뭐라고 외쳤는데 위험하니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요리조리 나무를 돌며 딸 수 있는 높이의 비파는 모조리 땄다. 두 박스를 채웠다. 나는 좀 놀라 비파를 어떻게 먹느냐, 저장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냥 생과일로 먹는다고 하였다.

중국인 여인은 나에게 잘 익은 비파 한 가지를 건네주었다. 높은 나무에 달린 것이어서인지 이 비파는 잘 익어 더욱 노란 황금색을 띠었고 지난번 내가 먹었던 것보다 더 먹음직스레 보였다. 우리 집 비파인데도 나는 땡큐라고 하면서 받았다.

노인은 남의 과일을 너무 욕심내는 게 미안했던지 자기 아내가 비파를 좋아해서 따주고 싶어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였다. 한국사람들도 비파를 좋아하느냐고 노인이 물었다. 나는 남부지방 일부에는 비파나무가 있지만 비파열매는 그렇게 인기 있는 과일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노인이 다시 벨을 누르고 나타나 감사하다고 하면서 마당은 깨끗하게 정리하였다고 장중하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여인이 건네준 비파를 깨끗이 씻어 다시 먹어보았다. 이번에는 신맛이 많이 줄어들고 달콤한 맛이 많이 나는 것이 마치 리치를 먹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슈퍼에서 시장에 갓 나온 생 리치를 본 바 있었다. 멕시코 산이라고 하였다. 리치를 보자 태국 생각이 났었다. 태국에서 리치를 많이 먹었다. 리치는 질긴 껍질을 벗기면 투명한 고무질의 과육이 나타나는데 달콤한 육즙과 함께 향기가 기가 막힌다.

리치는 양귀비가 사랑한 과일로 유명하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하여 남쪽지방으로 파발을 보내 언제나 리치를 공수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양귀비가 부러웠던 것은 최고의 미녀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이 좋아하는 과일을 보급하기 위하여 진정으로 애써준 지아비가 있었다는 점이다.

저 중국 노인이 현종은 아니고 그 아내는 양귀비는 아니지만 아내가 사랑하는 비파를 선사하기 위해 모르는 집 초인종을 누른 노인의 용기가 낭만적으로 여겨졌다.


중국인들은 황금색을 좋아한다. 황금색이 부를 뜻하기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은 신년인사로 수선화를 선물로 서로 보낸다. 제일 이른 봄에 노란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수선화 중에서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흰색 바탕에 노란 중심이 있는 '금잔은대(金盞銀臺)'라는 꽃이다. 흰색은 은을, 금색은 당연히 황금을 뜻한다.

게다가 금귤나무를 잘 심는데 중국 건물 안에 들어가다 보면 어느 곳이나 큰 금귤나무가 자라고 있는 화분이 놓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대놓고 황금을 숭상하는 그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속에서 생활했는지 참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비파나무의 열매가 완전 황금색이다. 금귤보다 나무도 크고 열매도 훨씬 풍성히 열린다. 조조도  이 과일을 즐겨 먹었다는 전설까지 붙어있다.  


비파는 양쯔강 남쪽의 모든 지역에서 생산되는데 특히 후베이 성, 쓰촨 성이 원산지라고 한다.

어쩌면 저 중국 노인은 중국 남부지방에 살았던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 자주 먹던 과일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듯이, 태국의 집집마다 망고나무가 있듯이 중국 남부지방에는 저 비파나무가 집집마다 있었던지도 모르지 않은가. 내가 가을마다 홍시를 기다리듯이 저 노인은 비파가 익기를 , 그리하여 모르는 집 현관문을 두드리게까지 되지 않았을까 온갖 상상을 해보았다.


중국 노인의 비파 사랑이 내게도 전파된 것인지, 그 후 나는 황금색 비파를 따서 생과로 먹어도 보고 샐러드에 넣어 먹어도 보았다. 비파의 새큼한 맛이 샐러드의 덤덤한 맛을 보충하여 꽤 괜찮은 조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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