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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들, 환자들 곁으로 돌아오세요.

당신들이 필요합니다.

by 보현


사고는 예고하고 일어나지 않는다. 갑자기 일어난다.

샤워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순간적으로 바닥에 미끄러지며 머리를 벽에 박았다.

전에 의자에서 떨어졌을 때는 몸이 천천히 떨어지며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순간적으로 미끄러져서 그랬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머리 뒤통수가 아파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의식은 있어 샤워기의 물을 잠그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오는 남편에게

“119”라고 외쳤다.

남편이 차 키를 들고 나왔으므로 나는 다시

“119”를 외쳤다.

나의 외침에

“이게 더 빨라”

하며 남편이 운전하겠다고 나섰다.

머리 뒤통수에 혹이 솟아올랐다.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았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팔목이나 허리의 통증은 한참 뒤에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죽는시늉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운전하는 남편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앓는 소리를 자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집 가까운 S병원까지 가는 길이 엄청 멀게 느껴졌다.

평소 침착하던 남편도 “우리 집 기둥이 잘 못되면 안 되는데...”하는 소리를 되내며 마음의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겨우 S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더니 병원에서는 의사가 없어서 받아줄 수가 없다면서 나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접수계의 사람은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보면서도 “119에 물어 가까운 이차병원을 물색하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그러고 보니 응급실이 텅 비어있었다. 남편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나를 휠체어에 앉힌 채 다시 우리 차로 갔다.

나는 “119”를 다시 외쳤건만 남편은 “119에서 알려준 병원의 위치를 알아”하면서 기어이 운전석에 앉았다.

나는 남편의 말대로 ‘우리 집 기둥’이다. 집안의 어려운 일은 항상 내가 앞장섰으므로 이번같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하는 일은 거의 처음인 듯했다.

특히 운전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내가 운전을 잘하기도 했고 남편이 운전에 서툴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은 회사 퇴직 후 도로 연수를 받아 가끔 운전석에 앉기는 했지만, 남편이 핸들을 잡으면 온 가족이 불안해했다. 더구나 응급상황에서 아내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할 형편이라 나는 남편이 긴장할까 걱정되었다.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이차 병원의 네비를 넣었다. 여전히 속이 매슥매슥하고 머리는 아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재의 큰 길가에 있는 이차병원에는 환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응급실도 운영하지 않아 번호표를 뽑아 대기해야 했다. 나는 뇌진탕이 일어나면 분초를 다투도록 병원 처치가 시급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사고가 나고 벌써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북적이는 병원 소파에 기대어 있으려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 방실방실 웃는 귀여운 손자 얼굴이 떠올랐다.

“하느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아직 할 일이 많아요” 하는 기도가 저도 모르게 나왔다.

남편이 안내 카운터에 가서 위급하다고 읍소하고 화를 내고 해서였던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의 차례가 되었다. 의사는 침착하게 나의 증세를 물었다. 의사 선생을 보는 순간 마음의 불안이 좀 가라앉았다. 나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의사 선생을 한없는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의사는 일단 의식이 있고 스스로 병원에 왔으니 심각한 일은 아닐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뇌 엑스선 촬영과 CT검사를 하고 의사의 판단을 기다렸다. 의사는 다행히 뇌출혈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고 하면서 근육이완제를 처방해 주었다. 다만 한 달간 유의 깊게 나를 지켜보라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

사고가 있고 거의 보름이 지났다. 가끔 머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뒤통수에 난 혹은 이제 거의 가라앉았고 팔목이나 허리의 통증도 많이 사라졌다.

나의 사고 소식에 친구들이 자신들이 겪은 화장실에서의 사고 경험을 신나게 이야기하였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져서 뇌진탕으로 죽은 사람들 이야기며 반신불수가 된 사례, 고관절이 부러진 사례까지 열심히 소개해 주어서 나를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물을 쓰는 한국식 습식 화장실이 엄청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이나 미국의 건식 화장실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물청소를 확 할 수 있는 우리나라 화장실 문화를 좋다고 여겼었는데 안전의 면에서 다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고로 현재 진행 중인 의료파업의 심각성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S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없어 환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을 때 나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응급실을 찾아 떠돌다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들의 보도가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접수계의 사람도 머리를 다친 경우 치명적이 될 수 있으니 빨리 치료가 가능한 이차병원을 찾아보라며 걱정을 하였다. 119에서 알려준 이차병원으로 가면서, 그 병원에서도 진료거부를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집 근처에 대형병원들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자주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듣게 된다. 나의 사고 이후, 저 차를 타고 가는 위급한 환자들이 지금 달려가는 병원에서 무사히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위급 환자들이 의사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래서 “의사 선생들이여, 얼른 환자 곁으로 돌아오시라”라고 외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이 얼마나 고약한 일이기에 의사들이 환자 곁을 떠났는가 싶으니 솔직히 이해하기도 어렵고 화가 난다.

나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엘리트로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의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의사는 당연히 우리 사회의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야 가능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뛰어난 지적 능력이 따라야 한다. 누구나 공부를 잘하고 싶겠지만 지적 능력이란 것이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타고나야 한다.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장기간의 학업을 뒷받침해 줄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따라야 하고 혹독한 연수 과정을 이길 본인의 의지와 체력이 따라야 한다.


이런 조건을 다 충족해서 마침내 전문의가 된다는 것은 수많은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고 연이은 행운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 혜택을 자신만의 능력과 행운으로 치부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행운을 누린 사람들은 행운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부채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의사란 무엇인가? 아픈 사람을 살리려는 거룩한 뜻을 품고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 오랜 시간 공부하고 젊음을 투자했으니 과실을 바라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의 엘리트들이 자신만의 이기를 위해 오로지 노력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다.

지금 파업 중인 의사 선생들은 웬일인지 너무 마음이 토라져 있어 이런 의무감을 지적하는 글에 대해 반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의사는 환자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환자는 아프다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슬프다. 환자 곁에 의사가 있을 때 환자들은 무한 신뢰로 의사를 존경하며 의지하게 된다.

자식의 등원을 거부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부모들도 잘 생각해야 한다. 자식을 엘리트로 잘 키웠으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인물이 되도록 자식을 격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학 도서관에 작은 기념 코너가 있다. 의사 이태석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인 그 이태석 신부가 우리 대학 의과대학 출신이었다. 나는 오랜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던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술을 펼치다가 2010년에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가 우리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가끔 이태석 기념관에 가서 이태석 신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박애정신으로 인류의 진보에 도움을 준 의사들이야 고금을 통해 수없이 많았지만 나는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태석 신부의 박애정신이 가장 감동스러웠다. 자신이 병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하여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고자 했던 사람.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의 학생들을 의사로 키워 가난한 조국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다. 이 신부의 뜻에 따라 두 명의 톤즈 학생이 우리나라로 유학을 왔다. 토머스 타반 아콧과 존 마옌 루벤이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 2009년 한국에 유학을 와 2012년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학교 의과대학교에 입학했고 2024년 마침내 한 사람은 외과 전문의로, 또 한 사람은 내과 전문의로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아콧은 “남수단에는 외과 의사가 부족해 간단한 급성 충수염이나 담낭염 등도 빨리 수술받지 못해 죽는 이가 많다”면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외과를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루벤도 “어릴 때부터 내전을 겪으며 의사가 없는 환경에서 진료를 못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많이 봤다”면서 “그 가운데 말라리아, 결핵, 간염, 감염성 질환 등 내과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내과를 선택했다”라고 했다.

남수단으로 돌아가야 할 두 의사의 어깨는 무거울 것이다. 의료기반이 취약한 데다 정치적으로 내전 상태에 있어 그들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조국 남수단으로 돌아가 이태석 신부의 유업을 이으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기사를 읽으며 감동하였고 숙연해졌다.


지금 성난 전공의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마이동풍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보니 병원을 떠난 의사들이 원망스러웠다. 나야 다행히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지금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저 엔블란스에는 얼마나 위급한 환자들이 의사를 찾고 있겠는가.


그러니 의사 선생들이여, 제발 화를 풀고 환자 곁으로 돌아오세요. 그 자리야말로 당신들이 있을 자리입니다. 아픈 환자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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