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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닐란 있습니까?

by 보현


오늘도 습관적으로 약국에 전화를 걸었다.

“하모닐란 있습니까?”

“없습니다.”라며 박절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광경을 예상하고 건 전화였다. 지금까지 벌써 근 반년을 이렇게 약국과 씨름하고 있다. 내가 물으면 전화기 건너편의 약사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없습니다.”하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언제쯤 들어올까요?” 하고 물어볼 새도 없다. 처음에는 그런 대응에 분통이 터졌지만 이제는 실망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실망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예. 500ml 찾으시죠? 400여 개 있습니다만, 몇 개나 필요하세요?”하는 대답이 들려온다.

“예? 진짜요?”

이번에는 내가 오히려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한다.

“이제 하모닐란 수급이 좀 나아졌나요?”

내가 반색하며 묻는다.

“글쎄요. 들어오다가 말다가 하니 있을 때 얼른 가지고 가세요. 의사 처방전 꼭 받아 오세요”


나는 의사처방전을 구하기 위하여 S병원에 급히 전화를 돌린다. S병원과 통화를 하려면 부처님 같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즈음 의료파업 중이라 환자가 많지 않은 모양이다. 전화 연결이 비교적 빨리 되었다. 하모닐란 구입을 위한 의사처방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오늘은 이비인후과 의사분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아 내일 오전이 되어야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400여 개만 남아있는 하모닐란 때문에 애가 탔다. 지금 당장 의사처방전을 받아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전화 응대하는 교환원에게 매달린다.

“다른 의사 누구 없을까요?”

교환원이 잠시 지체하더니 “꼭 우리 병원 아니라도 근처 가까운 병원 가서 처방전 받아도 되는데요.” 한다.

나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놀라워

“예? 동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도 된다고요?”라고 묻는다.


그리하여 입은 옷 그대로 아파트 상가 안의 내과로 달려갔다. 다행히 내과는 한적하였다.

하모닐란 3개월분의 처방전을 내어달라는 나의 요구를 듣고 의사는

“위루술 수술을 했군요.”

하며 컴퓨터 앞에서 한참 자판을 두드리고 앉아있다. 나는 마음의 초조함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없이 느린 의사의 손을 간절히 바라본다.

의사는 처방전을 내어주며 ‘상급병원이 아니기 때문에 3개월분의 처방전을 내어줄 수는 없고 한 달 치의 처방전을 끊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처방전을 받은 게 어딘가!


처방전을 손에 넣자마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남편에게 전화를 내었다.

“여보, 처방전 받았어요! 얼른 차 키 가지고 내려오세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남편의 실소가 들려왔다.

“마누라가 또 방방 뜨는구나”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나만 급한 것인가?”

나는 속으로 실소하는 남편을 원망한다.


아파트 입구에서 안달을 내며 남편을 기다리다 남편이 내려오자 마자 하모닐란이 있다는 약국으로 달려갔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남편이 약국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차를 길에 버려두고 약국에 들어가 보았다. 남편이 이미 약값을 치른 것을 보니 재고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아! 얼마 만에 약국에서 제대로 하모닐란을 구입하게 된 것인가! 그제야 나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한 달 치의 하모닐란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분의 하모닐란은 여섯 상자에 불과하다. 한 상자에 15개의 하모닐란이 들어있으니 하루에 3개씩 먹으면 한 상자로 닷새를 먹을 수 있다. 평소라면 3개월분의 처방을 받아 18 상자를 쌓아놓고 부자가 된 듯한 만족감을 느꼈을 터인데 여섯 상자라니 영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쌀이 달랑달랑하게 떨어지는 살림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러나 약국에 재고가 있으니, 앞으로 하모닐란을 구하기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새 희망을 가져 본다. 쌓아둔 하모닐란 상자를 바라보니 그동안 이놈의 하모닐란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태웠던가 마음속에 불덩어리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다.

지금껏 하모닐란, 하모닐란 노래를 읊었으니, 독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하모닐란은 남편이 먹는 경관 유동식의 한 종류이다. 남편은 5년 전 하인두암 수술을 하였는데,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입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뱃줄로 경관식을 넣어 살고 있다. 말하자면 경관식은 남편의 밥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되어 있는 전문의약품인 경관 유동식은 하모닐란과 엔커버 두 가지밖에 없다. 하모닐란은 독일 비 브라운사에서 만든 제품이고 엔커버는 일본 오츠카제약에서 만든 제품이다. 전문의약품으로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의료보험 혜택을 준다는 말이다. 만일 이들 제품을 의료보험 혜택 없이 구해 먹어야 한다면 환자들에게 주는 경제적 압박이 굉장할 것이다.

그런데 올 초부터 웬일인지 하모닐란이 수급 불안을 겪으며 시중에서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엔커버까지 덩달아 귀한 몸이 되고 말았다. 3월에 의사처방전을 받았으나 하모닐란도 엔카바도 제대로 구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전쟁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맨 반군이 홍해를 지나가는 배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화물선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를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는 설명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돌아서도 한참 돌았을 시점에도 여전히 시중에서 하모닐란도 엔커버도 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엔커버는 일본에서 오는 것이니 예맨 반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품이다. 전쟁 때문에 경관식 수급이 못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축분이 달랑달랑해져 가던 우리로서는 애가 탈 지경이었다. 밥을 굶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경관식을 대체식으로 주문해 두었다.


하모닐란을 수입 배포하는 oo약품에 전화를 내 보았다. 담당 사원의 설명에 의하면 수입 의료용 경관식의 수가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어 아예 수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그러면 경관식에 의존해 살고 있는 남편 같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회사의 설명에 의하면 곧 정부와 가격 문제가 타결되어 시중에 하모닐란이 풀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예맨 반군은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배신감이 몰려왔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동안에도 종종 이들 경관 유동식의 공급파동이 일어나 환자들이 고통을 겪은 바 있었다. 2018년에는 일본 오츠카제약에서 엔커버공급을 중단함에 따라 환자들 사이에서 경관 유동식 쟁탈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정부의 역할 중 제일 큰 것이 국민이 밥을 굶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닌가. 환자의 식사도 밥과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 수급 문제를 낳는가 하여 화가 났다.


시중에 제품이 풀린다고 하니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시중에서 하모닐란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담당 사원에게 하모닐란을 살 수 있는 약국을 알려달라고 몇 번이나 전화하였건만 늘 담당자는 휴가 중이라거나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뿐이었다.

5월이 되자 사태는 더욱 나빠졌다. 나는 S병원 근처 약국 전부에 전화를 걸었다. 지방의 대학병원 옆 유명약국에도 전화를 걸었다.

젊은 약사들은 한결같이 “없습니다.”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른 약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나이 지긋한 목소리의 약사가 전화를 받았다. 그 약사는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자기네 약국에 한 번 나와보라고 했다.

남편과 네비에 의지해 약국을 찾아갔다. 약국은 수서의 작은 아파트 촌 상가에 위치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노인 약사가 우리를 맞았다. 노인을 밥도 먹지 못하고 경관식에 의지해 살고 있는 남편의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가 아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한번 구해보겠노라고 하였다.

우리가 앉아 들으니 노 약사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여러 곳에 전화를 돌려 하모닐란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열심히 우리를 위해 하모닐란을 구해주려고 애쓰는 약사를 처음 만났기에 우리는 몹시 감동하였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결국 그 노인 약사가 시나브로 한 달에 결쳐 몇 상자씩, 하모닐란을 구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3개월분의 하모닐란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또 어쩔 것인가? 답답했던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청와대에 민원을 넣어보기로 하였다. 그것이 올 6월 중순의 일이었다. 환자도 국민이니 국민이 굶어 죽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강짜를 부리면서 경관식 수급문제를 해결해 주든지 아니면 국내에서 생산되는 경관식을 의료보험이 되게 해 주든지 하라고 청원을 내었다.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업체에서 의료보험 대상이 되도록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 나열되어 있었다. 기가 막혔다. 그걸 해결책이라고 제시한단 말인가!

나는 우리나라 제품들이 왜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지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경관식을 생산하고 있는 업체로는 정식품(그린비아), 대상(뉴케어), 한국메데컬푸드(메데푸드), 매일유업과 대웅제약이 공동으로 설립한 MD월INC(메데웰), KEF(한국엔테랄푸드)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제품들은 의약품이 아니라 식품으로 분류되어 있어 환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주지 않고 있다. 이들이 의약품으로 진입하려고 하면 임상시험과 의약품 허가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굳이 귀찮은 허가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 제품들은 한결같이 환자의 경관 영양식을 표방하고 있다.


청와대 민원과 응답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정책담당자들이 작은 약국의 노인 약사처럼 성의를 가지고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얼마나 좋을까. 왜 정책담당자들은 민원이 들어오면 화들짝 놀라며 문제를 재빨리 남에게 넘겨버리려고만 하는 것일까?

왜 경관식을 생산하는 대기업들은 환자들에게는 경관 영양식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식품이라는 카테고리에 안주하며 환자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우리나라에 경관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환자가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IMS 데이터에 따르면 급여 경장영양제 시장은 2011년 85억원 규모에서 2015년 237억원, 2018년 358억원으로 7년 새 4배나 성장했다. 매년 10%씩 오른 셈이다(출처: HIT News 2020.02.10 기사) .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22년 국내 케어푸드(특수영양식품+특수의료용도식품) 시장 규모는 5067억 원으로 전년 대비 15.3% 증가했으며, 2018년 이후 5년간 연평균 7.9%씩 성장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식품공전상 특수영양식품 및 특수의료용도식품에 해당하지 않는 품목인 고령친화식, 저염. 저당식단 등 일반 소비자용 맞춤형 영양식 등을 포함해 케어푸드의 시장규모를 약 2조 5000억 원(21년 기준)으로 추산했으며 2025년에는 3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 세계 케어푸드 시장 역시 환자용 식품(메디푸드)과 고령친화식품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향후 시장은 모두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수입품 메디푸드에 환자들의 운명을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정책담당자나 기업이 합심하여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달러 박스로 삼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충분히 가능한 나라에서 왜 뒷짐 지고 서서 환자들의 고통을 내 몰라라 하는지 모르겠다.

환자들은 환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프고 힘들다.


하모닐란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다시 한 달분의 식량을 확보해 왔으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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