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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9. 2025

외숙모를 보내며

추억 여행


외숙모의 부고를 받았다.

늘 마음속으로 궁금해하던 분을, 마치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은 분의 부고를 받아 들자 나는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라며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외숙모가 계신다는  부산으로 향했다. 한파가 몰려온 데다 갑자기의 일이라 교통편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외숙모의 마지막 모습과 영결(永訣)하고 싶었다. 외숙모는 내게 그런 분이셨다.


우리 엄마는 부산 근처의 철마, 그중에서도 구칠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철마면은 지금은 부산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거의 부산의 끝 자락이며 산세가 험준하여 지금도 시골 오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자가용도 없었던 당시 어떻게 외갓집을 다녔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지지만 어린 시절 외가를 자주 갔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만치 구칠은 어린 시절 나의 향수가 서려있는 곳이다.

시골에서 큰집, 작은 집 외가의 외할아버지, 외삼촌들과 이모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왜 그렇게 나를 귀여워해주셨던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우리 형제들 중에서 내가 유난히 우리 엄마를 쏙 빼닮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불행한 우리 엄마의 딸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내게 잘 대해주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한참 큰 다음의 나의 분석이다.


우리 엄마는 무남독녀였다고 했다. 어릴 때 양쪽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셔서 큰 집에 얹혀 살았단다. 나는 자라면서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길래 우리 엄마가 어릴 때 고아가 되어버렸는지 그게 늘 궁금하였다. 엄마도 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외삼촌들이나 이모들에게 여쭤보아도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무언가 숨기려고 하는지 그게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아무튼 엄마집은 딸 하나만 두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작은 집의 장남을 엄마 쪽으로 양자로 입양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내게 외삼촌과 외숙모가 생겼다. 엄밀하게 보면 외삼촌은 우리 엄마의 친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충직하고 정이 많았던 외삼촌은 입양 간 집의 누님을 친누님처럼 돌보셨다. ‘돌보셨다’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늘 가까이에 계셨다는 말이 더 맞겠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자주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 엄마의 말벗이 되어주시곤 했다.  

 

외삼촌이 우리 엄마의 동생으로 맺어지면서 외삼촌의 친 아버지는 내게 외할아버지가 되었고 친동생은 내게 이모가 되어주었다. 엄마가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큰집도 엄마에게는 구원(舊怨)의 대상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살뜰한 외가 역할을 해주었다. 큰집 외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옛이야기를 즐겨 해주셨는데 나는 마치 TV 드라마에 빠져들듯이 외할아버지의 구변에 녹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외가가 있던 구칠은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이었는데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훌륭한 외삼촌들이 여럿 나왔다. 모두들 체격도 좋고 인물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들이었다. 큰집의 큰 외삼촌은 얼마나 인물이 좋았던지 시골에 살면서도 계속 염문을 뿌려대어 어린 나도 큰외삼촌에 대해 쑥덕거리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외삼촌들 중에서 해군장성도 나왔고 큰 기업인도 나왔다. 엄마는 당신 친가가 동래정 씨의 양반피가 흘러서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하셨지만 그게 유전적인 것인지, 터가 좋아서였는지 아무튼 내게 궁금한 사항이었다.


외삼촌네는 아들만 세 명을 두었다. 다정하셨던 외삼촌은 우리 엄마에게 나를 당신 딸로 달라고 졸랐고 나는 울며 저항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당시 부산에서 일류라고 하는 중학교에 합격하여 세일러복을 입고 뽐내고 다닐 때, 외삼촌의 강권에 못 이겨 잠시 외삼촌 댁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당시 외삼촌은 동래군청 소속 운전기사로서 군수님을 모시고 다녔다. 인물도 좋고 체격도 좋았던 외삼촌이 양복을 입고 운전대에 앉아계시던 모습은 참으로 늠름하고 멋져서 어린 나의 가슴도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을 때였다. 개통 직전, 외삼촌이 나와 우리 부모님을 태우고 그 길로 드라이브를 시켜주셨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의 흥분되었던 감각이 지금도 남아있다.

 

외삼촌은 군청 사택에 살고 계셨다. 군청 사택은 마치 무슨 사당 같은 분위기였다. 넓은 마당이 있고 일본식 목조 집이 설렁하게 서 있고 주변에 큰 나무들이 지키고 있어 그 집의 기억은 설렁함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학교와 좀 더 가까워 학교 등교하기에는 수월했다.

그때 외숙모께서 나의 도시락을 지극 정성으로 싸주셨다. 달걀프라이에다 소시지 부침개, 특히 고구마볶음이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엄마의 도시락 반찬은 늘 같았다. 시퍼런 배추김치에다 콩잎 장아찌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도시락을 같이 먹을 때면 창피하여 도시락을 꺼내 놓기가 싫었다. 그런데 외숙모의 도시락은 친구들 보기에도 당당하여 하나도 저어함이 없었다.

외숙모는 말씀은 별로 많지 않으셨는데 속정이 깊고 우아한 분이셨다. 길쭉한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눈빛 하며 초탈한 듯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치 불교의 보살을 연상시키는 그런 분이셨다.

외삼촌 댁의 세 아들들은 나와 함께 지내게 되자 신이 난듯했다. 어찌나 개구지던지 내가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인 후 목욕을 하러 들어가면 문틈으로 나를 훔쳐보는 녀석들의 모습이 느껴져 사춘기의 나를 짜증스럽게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외삼촌 댁에서 지내다 나의 가난한 집으로 돌아왔다.


외삼촌이 폐암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철렁했다. 외삼촌과의 이별이 가까웠음이 절감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외삼촌이 입원해 계시던 송도의 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외삼촌은 살이 약간 빠져 보였지만 평소 그대로 평안하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나를 반기셨다. 유머도 잊지 않으셨다. 이런 멋진 분과의 이별이라니 마음이 참으로 먹먹했다.

외숙모가 병원을 나서는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넣었누?”하시며 나의 봉투를 들이밀었다. 나는 “외삼촌 외숙모께서 내게 주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앞으로도 많이 갚아야 해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외숙모께서 예의 그 품위 있고 근엄한 얼굴로 “나는 다 잊아뿟다. 니도 잊아뿌라 ”라고 하셨다.


나는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면서 외숙모의 그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외숙모의 “나는 다 잊아뿟다. 니도 잊아뿌라 ”라고 하시던 그 말씀은 외숙모의 보살과 같은 모습과 함께 내내 내 마음속에 살아있었음을 느꼈다.


먼 여로를 거쳐 외숙모의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검은 옷을 입은 상주들이 병풍처럼 나를 애워쌌다. 외삼촌 댁의 세 아들들과 아내들과 자식들이었다. 어린 시절 나의 손을 잡고 시골 유랑극장으로 데리고 다니던 양자이모도 와 계셨다. 모두들 과거의 흑백 필름에서 튀어나온듯 반갑고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특히 외삼촌댁의 장성한 세 아들들은 오랜만에 보는 나를 친정 누님 보듯 반가워하여 더욱 뭉클하였다. 우리는 얼싸안았다 손을 만졌다 하며 옛 추억에 젖었다. 동래 군청 관사시절이 떠올랐고 외숙모의 도시락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상기되었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평범했지만 위대한 한 여성을 추모하였다. 그 사람이 나의 외숙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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