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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6. 2025

구겐하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만난 고흐

뱃줄 달고 미 동부 여행


뉴욕 방문을 계획할 때 뉴욕의 3대 미술관인 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함께 구겐하임 미술관도 나의  버킷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가기 위하여 그 전날부터 지하철 노선을 열심히 익혔다. 딸과 사위는 출근했으므로 이제 남편과 둘이서 뉴욕의 이곳저곳을 가보아야 했다. 지금껏 딸네의 안내를 받아 뉴욕 구경을 편하게 하였는데 노인 둘이서 악명 높은 뉴욕 전철을 타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지하철에 오르자 웬 젊은이가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순간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인지라  “왜지?”, “우리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우리가 불안해 보였던가?” 소곤거리며 의문을 풀어보려고 하였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후에도 지하철에서 몇 번이나 자리를 양보받으면서 뉴욕 지하철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많이 누그러졌다.


86 스트리트 역에서 내려 구글 맵을 보며 5번가의 센트럴 파크 쪽으로 걷다 보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The MET)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났다. 다시 말하지만 미국같이 그리스식 건축양식을 좋아하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다. 장엄한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과 그리스 고린도식 기둥, 우아하게 펼쳐진 치맛자락 같은 대리석 계단이 웅장하고 압도적으로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


“아! 우리 힘으로 왔다”는 기쁨도 잠시 분위기가 뭔가 설렁했다. 몇 사람이 입구 계단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휴관일이었다.


실망하여 센트럴파크나 걸을까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남편이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가자고 제안하였다. 어차피 그곳도 우리의 방문 리스트에 있는 곳이니 나는 남편의 순발력을 칭찬하며 구겐하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센트랄파크의 경계를 따라 구겐하임 미술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센트럴파크에 멋진 느릅나무들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덜란드 잎마름병으로 미국 전역의 느릅나무들이 죽고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니 뉴욕에서 멋진 느릅나무들을 만날 수 있을 줄 몰랐다. 반가웠다.


센트럴파크의 느릅나무

 

5번가를 따라 북쪽으로 약 10분 정도 걸어가니 구겐하임 미술관의 회오리 모양의 건물이 나타났다. 이른 시간임에도 개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서 있어 놀라웠다.

이곳은 20세기의 건축대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설계로 유명한데, 그는 이 건물을 가운데가 뚫려있는 원형 홀 형태인 로툰다(Rotunda) 방식으로 설계하였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벽에 전시된  미술품을 자연광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레노베이션 중이어서 건물 일부는 폐쇄되어 있었다.


구겐하임미술관은 현대미술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간혹 ‘황금변기’ 같은 엽기적인 작품의 전시로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르노와르, 폴 고갱, 칸딘스키, 모네, 드가, 마네, 세잔느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뉴욕을 찾는 예술 애호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외관과 내부 모습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반 고흐의 그림 두 점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아를의 눈 덮인 풍경>이고 또 하나는 <어두운 집이 있는 생 레미의 산>이라는 작품이다.


 <아를의 눈 덮인 풍경>은 고흐가 아를에 막 도착하여 그린 그림이다. 고흐가 16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아를역에 도착한 시간은 1888년 2월 20일 정오였다. 고흐는 역 근처의 카렐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방에서 바라다본 눈이 있는 풍경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곳에 도착한 후 테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눈이 60센티미터나 쌓여 있다’며 이때의 풍경을 동생에게 전했다.


눈 내린 아를의 모습을 고흐는 마치 풍경화 같다고 표현하였는데, 한 남자가 강아지를 데리고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한 점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멀리 눈 덮인 하얀 산이 보이고 산자락에 빨간 지붕의 집도 한 채 서 있다. 고흐의 눈에 비친 아를의 첫 풍경이다.

이 그림은 파리에서 만난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탓인지 고요하고 밝고 아름답다. 일본 판화의 강렬한 색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고호의 그림은 네덜란드 시기보다 밝고 강렬한 색조를 띄게 되었다. 고요한 중에 무언가 아를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는 고흐의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를의 눈 덮인 풍경>, 1888년


이 그림의 어디에 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백익관의 부부 침실에 걸기 위해 구겐하임 미술관 측에 이 그림을 대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는  백악관의 요청을 거절하며 "유감스럽게도 우리 박물관은 고흐의 그림은 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 미술관에 전시했던 18K 금으로 만든 변기를 장기간 임대해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단다.  이 황금 변기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메리카(America)’라는 작품으로, 미술관이 1년간 5층 화장실에 전시하는 동안 관람객이 실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그림을 침실에 걸고 싶어 한 트럼프 대통령 부부의 허세는 우스웠으나 그림을 보는 높은 안목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구겐하임 측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미술관의 고흐의 그림은 특정인의 침실에 걸려서는 안 된다. 나 같은 사람도 볼 수 있도록 영구 전시되어야 한다.


구겐하임이 소유하고 있는 고흐의 또 한 점의 그림은 <어두운 집이 있는 생 레미의 산>이라는 작품이다.

고흐가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고갱과 헤어진 후 자신의 귀를 잘라 사창가의 여인에게 전해준 일로 인해 고흐는 아를의 문제아로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연명해 고흐를 이 마을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하였다. 거기에는 고흐가 사랑한 지누 부부도, 우체부 룰렝도 포함되어 있어 고흐에게 충격을 주었다.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심한 발작과 우울증상을 보였으며 수시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고흐는 자신의 담당 의사에게 그림만이 최선의 치료법이라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시기에 이틀에 하나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어두운 집이 있는 생 레미의 산>, 1889년


푸른 색조가 중심이 된 이 그림은 아를 시대의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떠나 네덜란드 시절의 어두운 색으로 회귀한 듯하다. 여전히 휘몰아치는 붓질은 고흐 그림의 특징으로 남아있으나 경계를 긋는 검은 윤곽선이 평면적인 대상에 실루엣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검은 윤곽선은 고갱의 영향이라고 하니 이런 화풍은 고갱과의 동거가 고흐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떤 그림을 보아도 고흐의 불행한 삶의 그림자가 느껴지니 이것이 나의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숲 사이에 있는 집을 <어두운 집>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마음이 어둡게 느껴진다.


이튿날 남편과 나는 다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했다. 어제의 경험이 있어 The MET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웠다. 미술관 앞에서 사람들의 긴 줄을 발견하자 오늘은 관람할 수 있겠구나 싶어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곳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는 총방문객이 700만 명에 이르러 세계 3위(루브르와 중국국립박물관 다음)의 인기를 자랑했으나 2024 년에는 550만 명이 방문하여 약간 후퇴한 기록을 보인다고 한다. 방문객 중에는 뉴요커가 60%를 차지하여 이곳이 뉴요커들의 사랑받는 명소임을 알 수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앞에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200만 점이 넘는 방대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전시실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길을 잃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전시물은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라고 하였다. 나는 딴 곳에 넋을 빼다가는 고흐 그림을 놓칠까 보아 전시실에 서 있는 경비원에게 고흐 그림이 전시된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사람들이 경비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화장실이 어디인가요?”라는 것이라고 하는데 비해 그래도 나는 고흐 전시실을 물어보았으니 그나마 나은 질문인 듯 싶었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답게 고흐의 작품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고흐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던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과연 뉴욕이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었다. 뉴욕에 이렇게 대단한 그림들이 몰려있게 된 것은 2차 대전으로 유명화가들이 미국으로 몰려왔기도 하고 미국의 자본이 세계최고의 걸작들을 쓸어 담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20세기초, 미국이 세계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철강이나 금융 등에서 신흥부자들이 속출하였고, 이들의 기증이나 유증에 의해 이곳이 세계최고의 미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전시작품의 라벨을 잘 읽어보면 제이콥 S 로저스란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다고 한다. 기관차제조업자였던 그는 1901년 죽을 때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메트 앞으로 남겼다. 그는 예술에 거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로저스의 이름은 아메리카관에서만 1500개 이상의 유물에 붙어있다고 하니 그가 기증한 5백만 달러의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메트의 4대 관장인 J.P모건은 희귀한 필사본과 예술품을 사 모으느라고 자신의 현금 재산 대부분을 썼고 그리하여 약 7천 점의 수집품이 메트에 소장되게 되었다고 했다.


이곳은 고흐 그림의 보고이다. 고흐의 자화상도 있고 해바라기도 있으며 협죽도, 지누 아주머니의 초상, 룰렝 부인과 어린 딸의 그초상화도 있다. 심플한 하얀 꽃병에 꽂힌 <아이리스>도 있다.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 1887년


The MET에 전시되어 있는 고흐의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은 1887년 파리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점묘법이라는 신인상주의의 색채이론을 응용하여 그렸는데, 고흐는 감성적 효과를 주기 위해 머리 주변에 후광 형태의 긴 붓터치를 가미했다.  이 표현기법은 후에 고흐의 그림을 특징지우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고흐는 맑은 눈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채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관광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고독하고 내면의 열정을 품은 그 얼굴은 어쩌면 몰려드는 경배자들에 당황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바라기>, 1888년


MET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직접 볼 수 있어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해바라기 그림은 고흐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고흐는 1887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해바라기를 그렸다. 바닥에 놓여있는 해바라기이다. 두 번째 해바라기 그림은 1888년 아를에서 고갱을 위해 그렸다. 그는 고갱이 아를로 오기를 기다리며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고갱이 방 침대에 누우면 정면에 보이는 곳에 걸었다. 모두 15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그림이다. 또 하나의 해바라기 그림은 벽에 걸었다. 그는 고갱이 자기의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해바라기 그림을 많이 그렸다. 고흐는 이 해바라기 그림을 그릴 때, 동생 테오에게 아주 멋진 그림이 될 것이라고 들뜬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낼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이 그림에서 푸른 바탕에 화면을 가득 채운 노란색의 해바라기가 마치 살아 꿈뜰 거리듯이 표현되어 있다.

그가 고갱의 방에 건 해바라기는 15송이의 해바라기가 꽃병에 꽂혀있는 그림으로서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뒤로 보이는 벽도 노란색으로 칠했고, 탁자와 화병도 한 가지 색으로 단순하게 색칠해서 해바라기 꽃이 더욱 눈에 띌 수 있도록 했다. 고흐를 무시했던 고갱도 <해바라기> 그림은 좋아했던 듯, 아를의 짐을 챙겨갈 때 이 그림은 가져갔다고 한다.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 <해바라기>


고흐는 아를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 우체부 조셉 룰랭을 모델로 하여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뉴욕현대미술관에서 설명). 뿐만 아니라 룰랭의 아내, 두 아들, 늦둥이 막내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 MET에는 룰랭부인을 그린 고흐의 그림이 두 점이 전시되어 있다.  


<자장가, 요람을 흔드는 사람>


그림에 나타난  오귀스틴 룰랭 부인은  넉넉한 풍채에다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다. 그러나 고흐는 이 부인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성모의 자애와 성심을 보았다. 메트에 있는 룰랭부인의 초상화는 조셉 룰랭의 인물화에서 처럼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두 손을 꼭 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고흐는 이 그림의 제목을 <자장가, 요람을 흔드는 사람>라고 붙였다. 자장가를 연상시킬 유일한 근거는 그녀가 붙잡고 있는 줄이다. 이 줄은 아이의 요람을 흔들기 위한 줄이다. 이 줄의 건너편에는 어린 딸 마르셀의 요람이 놓여있다. 부모의 사랑에 늘 결핍을 느끼고 있던 고흐는 룰렝 가족에게서 사랑이 넘치는, 그가 꿈꾸는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보았다. 고흐가 마지막 임종 시에도 이 부인이 부르던 자장가를 읊었다는 것이 고흐가 얼마나 따뜻한 사랑을 그리워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래서 화려한 이 부인의 그림을 보아도 슬프다.

고흐는 이 연작을 여섯점 그렸다. 그리고 한 점을 이 가족에게 건냈다.


아래 그림은 룰랭부인이 아기 마르셀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아기의 포동포동한 모습이 고흐의 붓끝에서 살아나고 아기를 안고 있는 부인의 옆모습이 자못 숙연하게 보인다.


<룰랭부인과 아기>, 1888


룰랭이 마르세이유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이 가족도 아를을 떠나게 되었다. 고흐가 그려준 여섯 점의 그림들을 가지고. 조셉 룰렝은 나중에 생활이 궁핍해져 고흐에게 받은 가족 초상화를 화상에게 팔았다.

마르셀을 그린 첫번째 그림은 2015년 11월 뉴욕 쇼더비 경매에서 7,642,0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드디어! The MET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앞에 섰다.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1889


고흐가 생 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이때 고흐는 생 레미의 노란 밀밭과 초록의 사이프러스의 대비를 즐겨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오른쪽에 사이프러스를 배치하였고 저 멀리 낮으막하게 보이는 아를의 산과 하늘의 뱅뱅 도는 구름들을 화면에 가득 실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아름다워 바라보고 있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림, 특히 명화가 주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이 그림 앞으로 세계인들을 끌어모으는 것이겠지. 고흐에게 다시 경의를 표해본다.


아래 그림도 사이프러스 나무이다.


그림 중앙에 하늘로 치쏫아 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과잉일 정도로 당당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늘의 구름도, 멀리 나지막한 산들도 사이프러스를 경배하듯이 우르르고 있는 형상이다.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이집트의 오밸리스크처럼 보았는데, 과연 이 그림에서 사이프러스는 푸르고 기세등등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다.


고흐가 하숙했던 집의 지누 부인의 초상화도 MET에 걸려있다.


노란색 바탕에 짙은 푸른색을 옷을 입고 초록색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강렬하게 보인다. 여인은 손으로 턱을 괴고 오만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다. 고흐는 지누 부인의 친절함에 헌사하는 의미로 그녀의 앞에 자기가 즐겨 읽던 책을 갖다 놓았다.  

이 그림은 1888년 고흐와 고갱이 아를에 같이 머무를 때 그린 그림이다.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을 모델로 하여 인물화를 그렸는데 두 사람의 그림이 매우 다르다.  


고갱이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


고갱은 지누부인의 앞에 술병을 놓았고 눈초리도 뭔가 음험한 듯, 묘한 표정으로 그렸다. 그림의 뒤로 보이는 여인들은 창녀들이라고 하였고 고흐가 사랑하던 룰랭을 창녀들과 어울리는 사람처럼 그렸으며 왼쪽에 술에 취해 엎드려있는 사람도 고흐가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던 사람이었다. 고갱은 이 그림을 통해 고흐를 조롱하였고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격분하였으니 두 사람의 불행했던 동거를 나타내는 지누 부인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흐의 그림에 한 표를 주겠다. 고흐의 그림은 강렬하고 지누 부인을 존중하는 사랑을 그림에 드러내었다면 고갱은 조롱하는 그림을 그렸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고흐가 승리자다.

 

아래의 그림은 고흐의 유명한 그림 <아이리스>이다.


고흐는 나무 그림도 많이 그렸지만 꽃그림도 즐겨 그렸다. 특히 생 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에는 외출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병원 정원에 핀 아이리스를 즐겨 그렸다.

이 그림은 화병에 담긴 아이리스를 그린 것이다. 흰 꽃병에 담긴 보라색, 또는 청색의 아이리스가 슬프리만치 청초하게 보인다. 고흐가 즐겨 사용하던 강렬한 배경색이 아니라 흰 배경 색이 더욱 아이리스를 청초하게 빛나게 한다. 아이리스는 화려하게 꽃을 피웠는데도 마치 소박맞은 여인처럼 가련함과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아이리스의 청초함은 마치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아름다움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져 더욱 슬프다. 고흐의 그림으로 인해 아이리스가 슬픈 꽃으로 각인될 것만 같다.


그에 비해 <아이리스> 근처에 놓여있는 <협죽도> 그림은 화려하게 요염함을 뽐내고 있다. 짙은 초록의 배경이 협죽도의 분홍꽃을 생생하게 만들어 준다.

<협죽도>

 


화병 아래에는 오래된 책 두 권이 놓여있다. 항상 책을 가까이했던 고흐는 그림을 그릴 때도 책들을 소품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낡은 책들을 보면 고흐의 고뇌가 새삼 더 느껴진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고흐 순례를 마쳤다.

고흐를 순례하느라고 그와 관련된 책도 읽었다.

고흐는 천재성을 가지고 인류를 빛낸 한 사람의 예술가임에는 틀림이 없었겠지만 그는 죽도록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명성에 목말라했으며 그림 한 점을 팔아 경제적 곤궁에서 해방되기를 열망한 평범한 보통사람이었다.  

고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좀 더 살면서 그림을 더 그렸더라면 고흐는 자기 그림이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를 따르고 경배하는 군중을 만났을 텐데. 역사에서 if라는 가정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고흐를 위해 안타까운 심정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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