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왔어요.
딸과 사위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 뉴욕의 센트럴파크이다. 이 거대한 공원을 결혼식장으로 썼다니 웬 말인가 싶겠지만 센트럴파크는 젊은이들의 프러포즈나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로 사랑받는다고 하였다.
딸내외가 자기들이 결혼식을 올린 센트럴파크의 한 아름다운 다리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하였다. 안 그래도 뉴욕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센트럴파크가 아닌가! 딸아이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서 우리 가족에게 센트럴파크는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 공원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 되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사위가 남편에게 서툰 한국어로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시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남편이 감격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나의 기쁨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혼할 생각도 없이 골드미스의 삶을 즐기는 듯한 딸의 모습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딸이 사위와 법원에 혼인신고를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떠난 것이 한국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 두 달 전이었다. 당시 딸은 결혼식에 입을 흰 원피스를 신중하게 골라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센트럴파크의 어느 다리 위에서 친구들 증인을 대동하고 결혼식을 올렸다면서 우리에게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의 딸은 예의 그 원피스 차림에 손에는 부케를 들고 사위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곳은 예쁜 다리와 뒷 배경의 나무들이 너무 멋지게 보여 나의 버킷리스트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벌써 8년 전의 일이었다.
센트랄파크라고 하면 넓은 잔디밭에 여기저기 누워 여유를 즐기는 뉴요커들이 먼저 떠오른다. 유럽의 궁전 정원에서 느꼈던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언가 자연 그대로의 방대함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뉴요커의 모습들. 딱 자유로운 대륙 미국의 상징적인 풍경 같은 것이 바로 센트럴파크의 이미지이다.
우리는 현대미술관을 지나고 플라자 호텔 앞을 통과하는 남쪽 코스를 통해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나무들이 끝없이 늘어선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크기가 100만 평이 넘는다고 하고 연간 4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 규모의 공원이 맨해튼의 금싸라기 땅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조금 걸어가자 큰 나무가 빙 둘러싼 넓은 초지가 나타났고 영화나 사진에서 본 것처럼 사람들이 공원에 둘러앉거나 서서 담소를 나누거나 먹거나 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센트럴파크의 상징 같은 곳, 쉽 메도(sheep meadow)였다. 쉽 메도는 말 그대로 양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를 일컫는다. 이제 양 대신 사람들이 풀밭을 차지하고 앉아 다양한 여가 활동을 누리고 있다. 친구들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먹고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혼자 누워 독서를 하는 사람들 등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군상들이 맨해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순간 옛날 도쿄에 살 때 신주쿠교엔에서 아이들과 원반을 던지며 놀던 생각이 났다. 그때가 내 마음속에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어 있는 풍경인가 보았다. 쉽 메도의 드넓은 잔디밭을 보자 동경시절의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공원 바깥으로 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높은 빌딩들이 마치 공원의 평화를 지켜주는 척후병들처럼 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소설가 샐린저도 센트럴파크를 자주 거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도 어쩌면 높은 빌딩들과 큰 나무들을 보면서 그들이 공원의 평화를 지켜주는 파수꾼처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채석장, 목장, 늪지대였던 이곳을 뉴욕시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1850년대에 거대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뉴욕시는 '센트럴 파크'를 건설하기 위해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하였는데 여러 팀의 지원자 중 자연주의자인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와 칼버트 보(Calvert Vaux)의 디자인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옴스테드는 마치 이때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센트럴파크를 열정적으로 디자인하고 만들어갔다. 그는 젊은 시절의 영국여행에서 영국의 풍경식 정원과 공원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소로우(Thoreau)와 에머슨(Emerson) 등의 자연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옴스테드는 도시에 자연을 닮은 공원을 도입함으로써 대도시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옴스테드가 이 공원 설계를 맡았을 때만 해도 맨해튼의 주택난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라고 하여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옴스테드는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하여 선지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호수를 만들고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곳에 심어진 약 50만 그루 이상의 나무들은 땅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도시가 품어내는 독소를 해소하고 맑은 산소를 쏟아내어 이 거대도시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숨구멍으로 만들어 주었다. 맨해튼의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10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미국의 축복이다.
옴스테드는 후일 스탠퍼드 대학을 건립할 때도 설계를 맡아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겼다.
메가시티에 큰 공원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뉴욕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세계 각지의 도시들이 이를 따라 하고 있다. 전후 일본이 왕실전용 사냥터 등을 신주쿠교엔이나 요요기공원으로 만들었고 우리나라도 여의도의 금싸라기 땅에 공원을 만들게 된 일 등이 옴스테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한 사람의 힘은 이렇게 크다.
큰 나무 아래로 난 길을 걸었다.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조깅족들, 워킹족들, 바이크족들, 심지어 말이 이끄는 마차까지 마구 엉겨 흥청이는 중이었다. 공원을 달리는 조깅족들은 지금도 센트럴파크에서 조깅 중 만나 결혼까지 한 케네디 주니어와 그의 아내 캐롤린 바세트를 꿈 꿀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겠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모든 사연들을 지켜보았을 거대하게 자란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거대하게 자란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마음이 충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센트럴파크에서 유명한 베데스다 테라스에 도착하였다. 테라스에서 눈앞에 아름다운 분수가 물을 품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테라스의 천정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새겨져 있었고 아치형의 문 사방에도 아름다운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중세의 어느 궁전 뜰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뉴욕에서 늘 느꼈던 것이지만 뉴욕은 세계의 수도답게 어디에나 사람이 많았다.
이 분수대는 뉴욕 시가 1842년 상수도관 개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베데스다란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치유의 샘 베데스다 연못에서 차용한 것에 틀림이 없다. 분수대 중앙에는 물의 천사인 베데스다 청동상과 평화, 건강, 순수, 절제를 상징하는 네 명의 아기천사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센트랄파크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로서 만남의 장소로 잘 사용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때에도 거리 공연이 있었고 세계각지에서 온 젊은이들의 활기로 넘치고 있었으나 뉴욕의 냄새, 오줌 지린내가 코를 자극하여 치유의 샘물과는 거리가 먼 곳임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이때의 건설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점이 뉴욕 공공도서관의 희귀 자료집에 남아 있다. 빅터 프레보스트(Victor Prevost)가 찍은 사진 작품이다. 프랑스의 사진작가였던 그는 1850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뉴욕의 주요 건설 프로젝트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특히 1862년 여름에 촬영한 당시 뉴욕의 이미지는 도시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센트럴 파크의 사진도 그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바로 베데스다 연못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황무지를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받는 장소로 만들다니 건설기술은 대단하다. 기적을 만들어 낸 것만 같다.
드디어 딸 내외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다리에 이르렀다. 보우 브리지(Bow Bridge)였다. 186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 보행자전용 다리로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아름다운 다리였다. 센트럴파크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이 보우 브리지라고 했다. 이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딸과 사위가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이 괜히 눈물 나게 감동이 되었다.
8년 전, 딸이 보내준 사진 뒤에, 배경처럼 둘러섰던 나무도 그대로인 듯하였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막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잎이 10월의 햇살아래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자란 나무를 보며 내 마음도 기쁨에 찼다.
보우 브리지 아래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보트를 대여해 주는 모양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있었다. 우리 눈앞에는 파키스탄이나 인도인 같아 보이는 청춘 남녀가 보트를 타고 있는데 막 신혼여행이라도 온 듯 사진사가 따라다니며 그들의 아름다운 날들을 기록해주고 있었다. 키스를 하라고 하는지 보트를 탄 한쌍의 남녀가 키스를 하였다. 벤치에 앉아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우리가 앉은 벤치 뒤에서 “와아”하는 함성이 들렸다. 목을 빼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여자 앞에서 프러포즈를 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친구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여성에게 포로포즈를 받아들이라고 재촉하는 흥겨운 모습이었다. 수수한 옷차림의 중국인들로 보였다.
가히 이곳은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이루는 장소처럼 보였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이때가 아닐까!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의 결실로 결혼식을 하고...
호수 건너편에 성처럼 펼쳐선 건물들이 이 사랑스러운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건너편에 비틀스 멤버 중 하나인 존 레넌이 살던 다코타 빌딩이 있다고 하였다. 존 레넌은 그의 아내인 오노 요코와 함께 센트럴파크의 이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자기 집 앞에서 한 광팬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센트럴파크에는 존 레넌을 위한 기념 공간이 있다.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라는 곳이다. 이 이름은 존 레넌의 출신 지역인 리버풀의 한 고아원 이름이라고 하는데, 존 레넌은 이 이름의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호수가 벤치에서 언덕을 약간 올라가니 존 레넌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인 ‘스트로베리 필즈’가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존 레넌의 팬들이 그의 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모자이크 기념비에 헌화하거나 인근의 잔디밭 혹은 벤치에 앉아서 존 레넌을 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길 한복판에 둥근 모자이크 기념비 가운데에 'IMAGINE'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데 젊은이들이 드러누워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인 듯 줄을 서서 차례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방문한 이날도 어떤 가수가 기타를 치며 존 레넌의 'IMAGINE'을 불렀다. 존 레넌이 피살된 것이 1980년 12월 8일이라고 하니 어느덧 45년이 지났건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존 레넌을 기념하여 세계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했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미국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우리 같았으면 벌써 망각의 인물이 되어버렸을 것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가 한 아파트를 가리켰다. 김환기 화가가 그곳에 머무르며(1963~1974) 작품활동을 한 곳이라고 하였다. 맨해튼의 셔먼 스퀘어 스튜디오(Sherman square studio, 160 west 73rd street)였다. 그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푸른 점들의 그림이 생각났다. 그가 떠나온 우리나라를 그리며 무수한 그리움의 푸른 점들을 찍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왔다. 이 아파트 앞에 기념 공간 하나를 마련해 주면 위대한 화가인 김환기를 위해 나도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뉴요커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생생한 기념의 장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딸과 사위가 결혼식을 올린 곳, 여전히 세계의 청춘들이 몰려와 사랑의 명세를 나누는 곳, 존 레넌이 피살되고 그의 추모 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바로 근처에 우리나라의 화가 김환기 선생이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수많은 푸른 점들을 찍고 있던 곳이었다.
센트랄파크는 옴스테드의 이상보다 더 많은 것을 후세에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청춘남녀들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동경의 신주쿠교엔에서 원반 날리기를 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