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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키웁시다

두 할머니들의 결의

by 보현


손자가 태어난 지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 손자 돌잔치를 하였다.

돌잔치라고 하여 무슨 거창한 행사를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손자를 중심으로 아들내외와 사돈내외, 그리고 우리 부부의 조촐한 점심 식사 모임이었다. 방이 따로 마련된 어느 식당에서였다.

며느리는 그래도 돌잔치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는지 인터넷에서 돌잡이 세트를 주문해 왔다. 실타래, 마이크, 판사봉, 마패, 청진기, 연필, 오만 원권 지폐 등이 놓인 소반을 손자 앞에 놓았다. 어른 여섯 명의 눈이 일제히 손자의 손으로 향했다.

그동안 몰라보게 자란 손자는 눈앞에 차려진 돌잡이 물건들을 바라보자마자 통통한 손으로 하나씩 집어 휙휙 던졌다. 마이크도 던지고 실타래도 던지고 판사봉도 마패도 휙 던졌다. 아이 엄마가 잡기를 원하는 청진기는 무서워 보였는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오만 원권 지폐를 집더니 빠닥빠닥한 촉감이 신기한 듯 손에 쥔 돈을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어른들이 아이가 돈을 집었다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아기를 바라보는 여섯 어른의 눈에 사랑이 뚝뚝 흘렀다. 특히 두 할아버지들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완전 매료된 듯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기들은 어떻게 저런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학자들은 어린아이가 귀여워 보이는 이유를 생물학적 본능과 진화적 생존전략으로 설명한다. 아기는 귀여워 보임으로써 어른의 보호를 받게 되고, 이는 생존율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종족번식에 유리하다고 본다. 아기의 둥근 얼굴과 통통한 볼을 바라만 보아도 보는 어른의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고 한다. 손자는 소고기가 맛있는지 제 엄마가 구워주는 소고기를 얼른 달라고 손을 내밀며 재촉하여 우리 모두에게 웃음을 주었다. 과연 손자로 인해 모두들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양육문제에 봉착하자 모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손자가 미국에서 들어온 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 아이를 봐줄 아주머니가 벌써 두 사람이나 그만두어 버렸다. 한 아주머니는 아이를 맡기로 한 후 사흘도 안돼 친정아버지가 입원하여 자기가 돌봐야 한다면서 그만두었다. 또다시 면접을 보고 정한 아주머니도 일주일을 못 견디고 그만두겠다고 하였단다. 그전에 입주한 가정에서 쌍둥이를 길러 주었는데, 그 일이 몸에 너무 무리를 주어 탈이 났다고 하였다.


미국에 있을 때, 좋은 아주머니를 만나 육아문제에 큰 도움을 받았던 며느리는 이제 완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이도 불안한 듯 죽어라 하고 어미에게 매달렸다. 엄청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게다가 한국에 오자마자 손자가 감기에 걸려 기침도 하고 열도 나고 콧물을 줄줄 빠뜨렸다. 캘리포니아의 온화한 날씨 속에 지내다가 서울의 날씨가 아이에게 너무 혹독한 것 같았다. 게다가 서울은 지금 감기 바이러스가 대유행이다. 서울같이 인구밀도가 높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금방 감염이 된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날은 가까워오는데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지, 아이를 봐주겠다고 온 아주머니들은 줄 사표를 내지 아들 내외는 완전 사면초가에 빠진 듯하였다.

두 번째 아주머니마저 그만두었다고 하자 내가 분연히 말하였다.

“안 되겠다. 며늘아, 네 어머니께 부탁하자. 나와 번갈아 아이를 키우자.”


옆자리에 앉아있는 안사돈은 미국까지 가서 외손자를 돌보느라고 이미 지쳐서 귀국하였다.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동안 흰머리가 부쩍 는 며느리의 친정 엄마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아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거둘 수 없는 바깥사돈은 사업차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홀로 거주하고 계신다. 허리 통증이 심하여 병원진료를 위해 한국에 들어오면서 아기 돌잔치를 겸한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바깥사돈은 몇 년 전 갑상선 암으로 목 부위를 3분의 2나 여는 대수술을 받았다고 하였다. 바깥사돈에게는 안사돈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지만 안사돈은 병든 남편보다 외손자의 양육에 더 발이 묶인 셈이었다.

나는 역시 손자를 바라보며 눈에 사랑이 뚝뚝 흐르는 나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 영감님도 하인두암으로 큰 수술을 받았고 지금껏 아내의 지극한(?) 보호 아래에 살고 있다. 나의 남편도 지금 아내의 손길을 손자에게 뺏길 위기에 처해 있다.


나이 들고 병약하여 아내의 도움이 절실한 남편들을 두고 지금 두 할머니들은 손자를 함께 돌보자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두 영감님들도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할 테니 당신 아내들이 손자 키우는 일에 보탬이 되라고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내리사랑은 종족 보존 전략에 부합한 진화론적 이유 때문인 것일까? 이미 기우는 인생보다는 새로운 생명의 보호에 자원을 배분하려는 우리의 본능 때문인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고기를 받아먹으며 기쁨의 손짓 발짓을 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마음의 준비가 된다.

“사돈, 우리가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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