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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4. 2023

안중근 도마에게 진 빚

영화 <영웅>을 보고

최근 안중근을 소재로한 영화 <영웅>을 보았다. 안중근이 사형당하기 직전 부르는 ‘장부가’나 안중근의 모친 조 마리아가 배냇저고리를 안고 아들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는 ‘내아들 도마야’는 너무나 큰 울림을 주어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눈물을 훔치며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안중근을 위시한 그당시 애국지사들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영화 <영웅>은 쓰러져가는 나라의 피 끓는 젊은이로서뿐만 아니라 한 어머니의 아들로서, 한 지어미의 남편으로서, 특히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죽음 앞에 선 한 청년의 고뇌를 진하게 느끼게 했다.

특히 안중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끝까지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다. 이 글에서는 영화에서 취급하지 않은 신자로서의 안중근의 삶을 추적해보고 천주교회가 그에게 진 빚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안태훈과 김구의 만남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 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안태훈은 고종 28년인 1891년 개최된 증광시 진사시험에 등과하여 안진사로 불렸다. 그는 개화파인 박영효와 친분이 있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일가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으로 이주하여 숨어 살았다고 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신천의 안태훈 진사는 문장과 글씨가 아름답고 지략이 뛰어나 해서지방은 물론이고 전국에 명성이 높아 조정 대신들도 크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동학군들이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탈취하자 안진사는 300명의 산포수(山砲手)를 모집하여 ‘의려소(義旅所)’를 세우고 신천군 동학군 토벌에 앞장섰다. 이때 16살의 안중근도 동학군 토벌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역시 황해도 해주 출신의 김구는 청년 시절, ‘평등한 새나라를 건설한다’는 동학의 이상에 경도되어 동학군에 가담하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담대함과 뛰어난 지략이 근방에 알려져 ‘아기접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인물을 아끼는 안진사가 김구에게로 사람을 보내어 서로 돕기로 결의하였다.

후일 김구의 동학군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김구는 안진사가 있는 청계동으로 피신하게 된다. 안진사는 자기에게로 피신해온 이 젊은 영웅을 온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다. 집 한 채를 매입하여 김구의 부모님까지 모시고 오게 할 정도였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


20세였던 김구가 16세의 안중근을 이때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김구는 이때의 안중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미 장가를 들어 자색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날마다 총을 메고 사냥을 다녔다. 안진사는 그의 두 동생인 정근과 공근에게는 언제나 “글을 읽어라”, “써라”라고 독려하였지만,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안중근은 무골기질로 태어났고,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사격의 명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안진사는 일찍이 장남 중근의 자질을 인정하여 그에게 선비보다는 큰 기개를 갖는 무장으로  키우려고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이 되어 손쓸 수 없이 기울어가는 시점이었다. 김구나 안진사도 다른 많은 애국지사들처럼 비분강개하며 조국을 구할 길을 찾으려고 했다. 이때 안진사는 천주학(天主學)에 마음이 경도되면서 신천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1897년). 중근도 도마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그동안 조선은 유래 없는 천주교 박해를 거치며 만 명 이상의 순교자가 나온 참이었다. 가까운 대원군 시대에도 8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1886년 프랑스와 조불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때 이후 프랑스 신부들은 수단을 입고 자유로이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것은 그보다 13년 뒤인 1899년 조선 조정과 뮈텔 주교 사이에 조인된 교민조약을 통해서였다. 이 조약으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인정되었다. 1897년, 신천의 토호세력인 안진사 집안이 천주교로 입교하자 빌렘 신부의 천주교회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된 셈이었다.


빌렘 신부



그러나 안진사 집안이 천주교회로 입교하게 되자 김구는 크게 실망하였다. 당시 유학을 신봉하던 김구는 안진사 집안이 동학군을 진압하더니 이제 천주학까지 믿게 되자 실망하여 안진사 곁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김구와 안진사 집안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의 사형 이후 안중근의 두 동생인 정근과 공근은 형의 유업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였다. 정근은 안중근의 가족들을 포함한 대가족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며 가장 역할을 하였고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과 모병,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딸 미생이 김구의 장남 인과 혼인하였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 공근도 큰 형의 유산을 이어받으려 노력하였다. 공근은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김구는 일경에 쫓겨 다니는 와중에도 안중근 가족에 늘 신경을 썼다. 그런데 공근이 김구 어머니의 피신에만 신경을 쓰고 안중근 가족의 피신에 신경을 쓰지 않자 김구는 공근을 크게 질책하였고 결국 이 일로 두 사람의 거리는 멀어졌다.     


      

천주교도 안중근 도마의 죽음

국권이 침탈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여러 활동을 시도하던 안중근은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의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그 과정에서 일군의 수뇌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게 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의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여 자기의 테러 행위(일본의 주장)로 인해 지옥에 떨어질 것이란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선대목구장(우리나라가 1831년 독립된 포교지로 인정될 때, 로마교황청에서 허락한 체제가 임시교구제인 대목구였다. 이 대목구 체제는 1962년 우리나라에 정식 교구가 허락될 때까지 유지되었다)인 뮈텔 주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안도마가 일본의 요인을 살해하여 두 나라 간에 긴장을 초래하게 된 것에 관해 분개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기를 적었는데(‘뮈텔주교의 일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알려진 1909년 10월 26일 자 일기에 의하면 “이토의 죽음은 공공의 불행이다. 증오를 일으켜야 할 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서 많은 공적을 쌓고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한국인은 은혜를 모르고 있다”라고 적어 그가 진심으로 이토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안중근의 행위를 배덕행위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살인은 악”이라며 천주교도로서 고백성사를 하고 죽음을 맞겠다면서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안도마의 청을 거절하였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에게 회개 곧 이토를 처단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신부를 보낼 수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뮈텔 주교


그러나 안중근 가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빌렘 신부는 안중근 가족의 고별성사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와 안도마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빌렘 신부를 찾아와서 안의사의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받아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외부 세계의 눈치를 살피며 선진 사법체계를 과시하려고 했던 일본 측이 안중근의 면회 허가를 내주자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뤼순 감옥을 방문하게 된다. 빌렘 신부는 뤼순 감옥에서 안도마의 고해성사를 두 차례 들었다. 그리고 3월 26일 오전 10시 안도마의 사행이 집행되었다.



안도마의 고백성사를 듣는 빌렘 신부(안중근의 맞은 편)


뮈텔 주교는 자신의 명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도마를 찾아가 성사를 베푼 빌렘 신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간의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한국의 실질적 통치자인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선교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의 마음은 그의 일기에 너무나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가난하고 불결한 나라를 위해 프랑스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이미 12명이나 순교한 것이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뮈텔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되 정경분리를 하자는 일본의 제안은 달콤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식민지를 개척하는 강대국이었다. 그는 피식민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일제에 병합된 조국으로 인해 비분강개하는 조선인 신학생들의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기도 하였다(뮈텔 주교의 일기).

주교의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빌렘 신부는 성직자로서 천주교 신자 사형수에게 성사를 거행한 것은 정당하다고 주교에게 항의하였고, 파리외방전교회와 로마교황청에 그 부당함을 호소했다. 로마교황청은 빌렘 신부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논란 중의 두 신부를 함께 둘 수 없다고 판단해 빌렘 신부를 프랑스로 소환하였다(1914년). 빌렘 신부는 후일 천주교 신자 사형수에게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뤼순 감옥으로 갔던 자신의 판단과 행동은 정당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가 면회한 사형수 안 도마는 대한독립을 위해 그리고 동양평화를 위해 ‘의거’를 단행한 천주교 신자였음을 증언하였다.
 안중근은 가족에게 자신의 시신을 하얼빈에 묻었다가 조국이 해방되거든 반드시 조국으로 이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의사의 시신을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고 그 장소는 극비에 붙였다. 그 후 지금까지 안의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를 위한 변명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의 친일적인 행동이 또 한 번 노정되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이는 안중근의 조카인 안명근(큰 아버지의 장남)이 안중근의 거사에 감화를 받아 무장독립투쟁의 길로 나서면서 시작이 된다. 안명근이 북간도에 독립군을 양성할 군사학교를 세우려고 모금 운동을 전개할 때, 빌렘 신부는 이 모금 운동을 안명근이 주도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게 된다. 빌렘 신부가 이 사실을 뮈텔주교에게 알린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뮈텔 주교가 눈 내리는 겨울밤, 명동성당에서부터 현재 남산한옥마을 자리에 있었던 일본군 헌병사령부까지 걸어가 헌병 사령관 아카이시(明石元二郞)에게 밀고하였다(뮈텔 일기· 1911년 1월 11일 자). 뮈텔은 그 기회를 이용해 명동성당 앞의 큰 통로를 확보했다고 기뻐했지만, 뮈텔의 밀고로 인해 1911년 1월 1일부터 안명근을 비롯해 105명이 일본군에 끌려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역사는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빌렘 신부나 뮈텔 주교를 위해 변명의 말을 할 수도 있다. 우선 뮈텔 주교는 우리나라에서 40년간을 대목구장으로 사목 하는 동안 우리나라 천주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특히 정성을 들인 일은 순교자들의 사료를 정리하고 순교자 현양 운동을 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을해교난, 병인교난 순교자 79인의 시복운동을 전개하여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자 79위에 대한 시복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여의도광장에서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이 성사된 기초가 되었다. 그는 요동땅에 묻혀있던 초대 주교 브뤼기리에 신부의 유해를 서울 용산 성직자묘지로 이장했고 다른 순교자들의 묘 이장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뮈텔주교는 서양 수도회의 조선 진출을 이끌어 독일 성베네딕트회가 우리나라에 진출하도록 힘썼다. 명동성당을 위시하여 많은 성당들이 그의 치하에서 건축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성실히 적은 일기는 우리나라의 천주교회사와 한국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도 서양선교사들에게는 괴로운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900년 초 우리나라를 서양에 소개하는 책들이 간간이 발간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사람들은 주로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조선의 20세기 초의 공통된 모습은 ‘똥쿠린내가 앙동하는 한양’이라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프랑스나 선진 유럽 제나라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짐작이 된다. 우리나라에 파견된 프랑스 신부들은 대개 농민의 자식이거나 지방 소도시 노동자 집안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조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느낀 고초가 얼마나 컸겠는가 상상해보면서 빌렘 신부나 뮈텔 주교의 마음을 헤아려보고도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피를 흘리며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자기 양들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너무나 예리하게 지적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코린 1 13,3)     



안중근 도마의 복권

안중근 도마를 복권한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추기경은 1993년 8월 21일 ‘안 의사 추모 및 복권미사’를 집전하였다. 교구장은 “안 의사의 행동은 조국과 민족의 방어를 위한 의거로서 단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복권을 공식 선언했다. 안의사가 공식적으로 파문된 적이 없기 때문에 공식적인 복권은 없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 치하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과오를 범한 데 연대 책임을 느낀다.”라고 한 것은 상징적인 복권이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에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3·1 운동 정신의 완성은 참평화’라는 담화문을 통해, “백 년 전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설 때에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면서 당시 한국 천주교지도부가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라고 과거사를 고백·반성했다.

이후 안도마의 순국 100주년을 맞은 2010년 3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集殿)으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 미사를 통해 안도마는 천주교 신자임이 공인돼 공식적으로 천주교의 품 안으로 들여졌다

한술 더 떠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업무에 착수했다(2011년 10월 31일). 염수정 주교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으며 그분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한다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가 시복 되게 하고자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최근들어 격세지감의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 도마의 삶을 생각하면 이 모두가 만시지탄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안도마를 내팽겨쳐두고 살았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한 편의 영화가 이 모든 역사를 슬프게 노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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