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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an 08. 2023

아! 윤노빈 교수

최근 조선일보를 읽다가 윤노빈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눈을 의심했다. 조선일보 2022.12.17. 일자 <아무튼, 주말판 > 기사를 통해서였다. 풍수학자(風水學者) 김두규가 시인 김지하와 나눈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윤노빈 교수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아! 윤노빈 교수가 아직 살아있었구나!” 

나는 신문지면에 윤노빈이라는 이름 석 자가 찍혀 나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윤노빈 교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그는 내가 대학생일 때 철학을 가르쳤던 교수였다. 나는 그 당시 윤 교수가 얼마나 훌륭한 학자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놀라운 학문적 충격을 받았다. 훌륭한 인품이 느껴지는 외모에다 부드럽고 세련된 서울말로 강의를 했던 분이라는 기억이 남아있다. 나는 완전히 빠져 그의 강의를 들었다. 윤 교수가 얼마나 질서 정연한 논리로 강의를 했던지 강의내용을 적은 노트가 그대로 한 편의 논문이 될 정도였다. 

당시 대형강의실에서 공대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들었는데 대형강의실의 소란함도 나의 집중력을 방해하지 못했다. 시험 기간이 되었을 때 나의 주가가 갑자기 올랐다. 어떻게 알았던지 남학생들이 나의 노트를 열렬히 원했다. 

윤교수의 강의의 요점은 이제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추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윤 교수가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풍문을 듣게 되었다. 

그 후 황장엽 씨가 북한을 탈출했을 때, 태영호 씨가 가족을 이끌고 우리 땅으로 넘어왔을 때, 나는 윤 교수와 그 가족을 생각했다. 남쪽을 택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북한의 질식할 것 같은 참혹한 분위기가 전해질 때마다 나는 윤교수와 그 가족이 걱정되었다. 여전히 

“윤교수는 왜 북한을 선택했을까? ” 

“그곳에서 그는 그를 지배해 왔던 철학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북한 체재 하에서 그와 그의 가족은 행복했을까?”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윤노빈 교수가 김두규가 김지하에게 제시한 ‘남북한 통일 후 행정구역 개편’을 읽고 김지하에게 자기의 소견을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윤 교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1941년 생이니까 지금 그의 나이는 여든둘이다)과 그가 친구인 김지하를 통해 소식을 전해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가웠다. 윤 교수는 김지하와 강원도 원주에서 같이 자랐으며 서울대학을 같이 다닌 절친이라고 한다. 김지하는 친구 노빈이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좌익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그의 북한행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라면 그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학할 때 헤겔 철학에 경도된 점 정도를 꼽는다.


윤 교수에 대한 정보가 혹여 어딘가에 소개되어 있는지,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윤 교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학회에서도 윤 교수의  <신생철학(新生哲學)>에 대해 토론하는 담론의 장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에서 윤 교수 가족과 친하게 지냈던 한 탈북자가 전하는 그의 가족 근황이었다. 윤교수는 대남흑색선전 방송의 책임자가 되어 활동했다고 했는데, 역시나 북한 체제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몹시 고생했다고 전했다. 그가 북한으로 갈 때 가족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내 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아무리 가장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윤 교수의 입장이 더 어려워진 것은 그와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던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탈출하면서였다고 한다(1986년). 오길남은 1970년,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는데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가족과 함께 입북한 인물이다. 그 가족은 북한 공항에 내려 환영 나온 바싹 여윈 북한 어린이들을 보는 순간 자기들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오길남은 이듬해인 1986년, 독일 공작원으로 파견되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탈출했다. 아내와 두 딸은 북한에 둔 채였다. 그의 탈북 직후 아내와 딸들은 15호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오길남의 아내는 남편의 탈출로 나머지 가족들이 당할 불행을 예상하면서도 남편의 탈출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그 후 오길남은 유럽을 떠돌며 북한 당국에 자기 가족을 돌려달라고 눈물로 청원하고 다녔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후회로 찢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현실적인 어려움은 북한에 몰아친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전한다. 그 부인이 시장에서 꽈배기 장사를 하며 겨우 연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런 윤 교수가 그 가혹한 세월을 견디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다니 마음의 착잡함을 이길 수 없었다.


윤노빈 교수를 이해해 보려고 그가 유일하게 남긴 책인 <신생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았다. 그는 헤겔 철학으로 무장하되, 헤겔의 변증법을 시작으로 삼아 동학사상을 결합한 ‘생명철학’을 제창함으로써 동서철학을 결합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사람이 곧 한울(하느님)’이라는 사상이다. 윤 교수도 인간은 본래부터 협력과 선을 잘 실천할 수 있는 상태(하눌님), 즉 생존적 존재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분열을 일으키는 ‘악마적 존재’ 때문에 생존적 존재가 깨지고 고통받는 상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마는 이간질, 분열, 분단, 차별, 수탈, 죽음을 일으키는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본래의 아름다운 상태를 되찾기 위해서는 분열을 일으키는 악마적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뿌리치고 생존으로 옮겨오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방법론적으로는 사람 사이의 연대를 통해 악마를 물리치고 극복함으로써 ‘큰 나’로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도 ‘큰 나’로 되어야 하고 너도 ‘큰 너’로 거듭나야 우리 속에 있는 고유한 ‘한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외세의 악마적 존재가 한국 민중의 생존을 가로막고 자유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민족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제적인 모순이 폭발되면서 분단된 대한민국을 극복하기 위해서 철학의 과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북한행은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다는 한 철학자의 실천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치적 부조리에 항거하고 응징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어쩌면 오길남 박사도 윤노빈 교수도 당시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에서 북한을 하나의 대안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사고가 짧아 한 천재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과연 북한을 통해 그의 사상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탈북자들을 보면서 우리 체제가 우수하다고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나 고통받고 있는 북한인들과 특히 지식인들이 겪고 있을 그 지옥 같은 현실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많은 일에 무관심하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처럼 여긴다. 

그래서 윤노빈 교수의 그 기막힌 사정에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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