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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Feb 27. 2023

오마니 떡과 감자 고로게

추억의 음식

   

집으로 이름 모를 택배 하나가 왔다. 보낸 이의 이름이 없고 수신자는 ‘ooo의 오마니’로 되어 있었다. ‘오마니’란 어머니의 평안도 사투리이고, 앞의 세 글자는 우리 집 딸아이의 이름이므로 이 물건은 내게로 온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제법 묵직한 택배의 내용이 궁금하여 요리조리 훑어보다가 포장을 뜯어보게 되었다. 안에는 유명떡집의 인절미가 들어있었다.  


누가 내게 이것을 보냈을까? 딸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딸과 관계있는 인물일 것이다. 우선 사돈댁을 생각해보았는데, 사돈댁이 과거 이북에서 월남하였다고는 했지만, 평안도 분이라고 듣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ooo의 오마니’라는 장난스러운 제목을 붙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택배 제목에서 유머 감각이 느껴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의문은 딸의 전화로 풀리게 되었다. “엄마, 명희가 엄마에게 떡을 보냈다고 하니 잘 드세요.” 하는 것이었다. 명희는 딸아이의 초등학교부터의 친구이다. 서로 마음이 잘 통했던지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명희가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은 딸 아이를 통해서 들은 바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명희가 왜?”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의 궁금증에 대해 딸아이는 “우리 어릴 때 엄마가 감자 고르게 잘 해 주었잖아. 명희가 엄마 고르게가 그렇게 맛있었대. 그래서 이담에 돈 벌면 꼭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명희를 떠올려보았다. 재치있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던 명희라면 ‘오마니 떡’을 보낼 만하다고 혼자 미소지었다.     


“감자 고르게라니! 내가 딸아이의 친구들에게 감자 고르게를 해 주었단 말인가?” 하고 아득한 기억을 소환하려고 애써보았다. 물론 아이들 어릴 적에는 감자 철마다 감자 고르게를 빼지 않고 해 주었던 기억은 있다. 햇감자를 삶아 으깨고 거기에 소고기를 좀 넣은 다음 둥글게 뭉쳐 밀가루, 달걀, 빵가루 순으로 옷을 입혀 기름에 튀기면 황갈색의 멋진 감자 고르게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딸 아이의 친구들에게 감자 고르게를 해 준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딸아이의 친구는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본 감자 고르게 중 내가 해 준 것이 가장 맛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감지덕지할 일이다.      


우리 가족들이 나에게 가지는 음식 추억은 명희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직장생활을 오래 한 나로서는 음식 만드는 데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이지 못했다. 워낙 음식 솜씨가 별로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음식에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은 남편일 것이다. 남편은 시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맛의 미묘한 차이를 예리하게 구분해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보통은 나의 음식을 참고 먹는데 가끔씩은 비평을 쏟아놓아 나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기도 한다. 

첫 실망이 결혼 초의 나의 라면 끓이는 솜씨였을 것이다. 남편은 자취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라면 끓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했다. 라면 결이 꼬득꼬득하게 살아있는 그 기막힌 타이밍을 줄곧 주장했지만 라면을 별로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라면에 대한 특별한 기호도 없이 살았던 나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이 나에게 시범을 한번 보여주었더라면 좀 낫게 라면을 끓였을텐데 결혼한자의 특권을 누리고 싶었던 남편은  손도 까딱하지 않고 앉아 물이 너무 많다느니 너무 퍼졌다느니 잔소리만 해댔다.  

딸은 아빠보다 더 비판적이어서 좀 해서 나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지 않는다. 한번은 사위를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할 때였다. 미국에 살고있는 사위가 우리집에서 식사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준비에 꽤 신경을 기울였다. 내가 차린 음식을 먹으며 사위는  “다링이 어머니 음식 솜씨가 없다고 해서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다 맛있는데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딸이 사위의 다리를 찼지만 때는 늦었고 나는 이미 듣고 난 뒤였다. 고백하건대 그때 배신감을 엄청나게 느꼈다. 지 신랑에게 나의 음식 솜씨에 대해 그 정도까지 험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딸은 나의 멸치볶음을 잘 먹는다. 엄마의 멸치볶음은 멸치 강정인지 멸치볶음인지 모르겠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으로 쏙쏙 집어넣는 모양새가 맛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딸을 위해서는 멸치볶음을 언제나 준비해둔다. 잔멸치에다 돌아다니는 견과류를 잔뜩 집어넣고 고추장 약간에다가 꿀과 설탕과 물엿을 넉넉히 쏟아부어 볶아놓으면 윤이 반들반들하게 나면서 입은 즐겁다. 딸아이가 집을 떠나있을 때 엄마표 멸치볶음은 그리워할 것 같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 엄마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는 유일한 인물은 아들이다. 아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 때는 “훌륭한대요. 호텔 음식보다 맛있는대요” 따위의 말을 연발하며 나의 노고를 치하할 줄 안다. 그럴 때면 아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마음이 절로 뿜어져 나온다. 아들은 사돈댁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장모님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며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아들이 먼 이국땅에 가서 살며 “엄마의 냉이된장국이 그리워요”라는 말을 해오면 정말인가 싶어 당장 냉이를 사서 미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한때 나의 연구주제가 ‘어떤 사람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가? 정말 음식 솜씨는 타고 나는가?’ 라는 것이었다. 모대학의 김치연구소와 연계하여 명가김치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였다. 우선 유명한 김치 명가를 수소문해 다니며 김치담그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당시 손맛에 대한 과학적인 호기심이 비등할 때였다. 특히 김치의 맛은 유산균 발효가 좌우하기 때문에 그 몸에 좋은 유산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좋은 손맛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유추하던 시점이었다. 

음식명인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음식 솜씨 좋은 사람의 특성은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관찰하였다. 과학적인 관찰이라고는 할 수 없어 논문으로 쓰지는 못하였지만 내 나름대로 관찰한 바에 따르면 분명 음식명인은 무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손 모양이었다. 손마디가 짧고 엄지 아래 살점이 두둑한 사람이 음식도 잘 만들고 살림도 야무지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다구지게 보이는 손이다. 나의 손 모양은 가늘고 살집이 별로 없어 한눈에도 살림과는 인연이 덜할 것 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이 손이 꽤 예뻤던지 중학교 미술 시간의 데생 시간에는 모델로 선정될 정도였지만 실생활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셈이었다. 

둘째는 행동이었다. 음식을 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음식 만드는데 관심이 많았다. 음식하기를 좋아하고 통도 커서 음식을 많이 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음식은 먹을 만큼 조금만 하고 나머지 음식은 다 버리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을 때였다. 시골에서 우리 신혼집으로 오셨던 시어머니께서 나의 밥을 기다리며 허기가 져서 “야야 식은 밥이 살림 밑천인데 너그 집에는 식은밥도 없나?”하시며 역정을 내신 적도 있었다. 

셋째는 유전적인 성향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둘째 요인과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친정엄마의 음식 솜씨는 딸에게로 대물림되는 것 같았다. 유명 맛집을 보면 친정엄마의 솜씨를 이어받은 곳이 많은 것도 나의 분석에 신빙성을 더하였다.  

우리 친정엄마는 열심히 우리 형제들을 먹여 살리셨지만 별로 음식 솜씨라고 내세울 것은 없었다. 남편은 장모님으로부터도 나로부터도 맛있는 음식을 못 얻어먹었으니 그런 점에서 남편을 위해 애도를 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못 먹고 자라서인지 지금도 음식에 대해 별다른 기대도 없고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내켜 하지 않는다. 자식들이 맛집이라고 야단을 떨어대며 나를 데리고 가면 괜히 맛집 옆집의 텅 빈 가게가 걱정되어 그 집에 가서 한 그릇 사 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그 후 음식 솜씨에 대한 나의 가설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맛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맛없는 손은 없다. 자꾸 하다 보면 음식 맛은 늘게 마련이라고 생각되었다. 퇴직 후 시간에 여유를 가지다 보니 요리시간이 즐거워지고 내가 봐도 요리의 요체를 알 것 같은 눈이 생겼다. practice makes perfect. 역시 관심과 노력이다.      


남편에게 좀 나은 음식을 해 주려고 작심할 무렵 남편이 암으로 목 근육을 상당히 절제하게 되었다. 이후 입으로 음식 삼키는 것이 어려워졌다. 뱃줄에 의지해 조제된 영양식을 꽂고 연명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너졌다. 어째 이리도 인생은 어긋나기만 할까. 

수술 후 4년 차에 들어선 요즈음 남편은 약간의 음식을 먹게 되었다. 입으로 음식을 먹는 감동의 순간에 남편이 가장 먼저 찾은 음식은 밥과 된장찌개와 김치였다. 역시 밥과 김치와 된장찌개는 한국인들의 소울푸드임에 틀림없다. 남편은 된장찌개에 밥을 적셔 한입 겨우 먹으며 나의 된장찌게가 맛있어졌다고 칭찬한다.  

   

‘오마니 떡’이 음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내가 만든 감자 고르게가 어떤 사람에게그리운 추억으로 남았다니 참으로 감동적이고 뿌듯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생에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요즘같이 레디 메이드된 봉지 음식을 먹는 세대는 수퍼에서 팔던 무슨 쉐프가 만든 몇 년도 버전이 제일 맛있었다고 기억할까? 그건 좀 슬플 것 같다.      


참고로 고르게는 프랑스어 크로켓을 일본인들이 일본식으로 부르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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