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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r 14. 2023

아파트 탐매기(探梅記)

매화가 피었다

서울 도심의 아파트 뜰에도 매화가 꽃을 피운다. 아직 날이 찬데 매화가 마치 팝콘 터지듯 하얗게 꽃잎을 터뜨리며 바람결에 청아한 향기를 날리면 그 향을 맡아보려고 코끝을 킁킁거려 본다. 이른 봄에 제일 먼저 피는 매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감동이 없는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던 아이가 흰 꽃을 바라보며

“엄마 저게 뭐야?”

라고 물으니 젊은 엄마는  

“응, 살구꽃이야”

라고 한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살구꽃이 아니고 매화예요”

 라고 말해주려다가 참았다. 매화와 살구꽃을 구분 못하는 젊은 여인에게 말해서 무엇하랴 싶었다. 그래도 매화와 살구꽃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시절에 아름다운 꽃 이름과 향기를 기억하게 해주면 그 인생이 훨씬 풍부하게 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아파트에는 백매와 청매, 홍매가 다 있다. 2월에 접어들면 매화가 피었는가 하고 지나갈 때마다 나무를 쳐다보게 된다. 백매가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고 이어서 청매가 피고 마지막으로 홍매가 꽃잎을 터뜨린다.   


아파트에 핀 매화


비록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보는 매화지만 매화에는 매화를 유독히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매화는 선비들의 꽃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선비들은 특히 엄동설한에 피는 매화를 기개의 상징으로 칭송했다.  선비들의 매화 사랑은 매화의 원산지인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매화를 사랑하는 풍조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매화 사랑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송나라 때의 시인 임포(林逋)였다. 매화 마니아였던 그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옥을 짓고 은거하면서 집 둘레에는 삼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는 매화나무 사이를 거닐며 여러 편의 매화시를 남겼는 데, 그 중에서 ‘산원소매(山園小梅)’가 유명하다.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달은 이미 어스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매화향을 벗하며 혼자 살아가는 시인은 벼슬아치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다. 마치 요즘 남자들이 TV의  ‘자연인’ 프로그램을 동경하는 것 같은 심정이라고 할까.  

   

임포에 대한 동경은 한반도에까지 당도하였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 중 한 사람인 장유(張維)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서 ‘예로부터 매화에 관심을 쏟은 이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그야말로

“높은 품격과 뛰어난 운치를 보여주며 주객이 서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영원토록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화정처사의 그것만이 존재할 뿐”

이라고 극찬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이 ‘매처학자’와 ‘고산방학(孤山放鶴)’을 그린 것도 임포에 대한 인기도를 말해준다. 그래서 인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매화가 자리 잡았다.      


일본인들의 매화사랑도 못 말린다. 이곳저곳에 매화원을 조성하고 세상의 온갖 종류의 매화를 한곳에 모아 이른 봄이면 매화향에 젖어보려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매화 마니아가 텐만구(天滿宮)에 모셔져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이다. 그는 헤이안 시대 제일가는 천재로 칭송받은 인물이다. 그는 격이 낮은 학자 가문 출신이었지만, 후일 재상급인 우다이진(右大臣)의 지위까지 올랐다. 당시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던 천황의 외척인 후지와라 일족의 시기와 무고로 쿠슈로 좌천된 미치자네는 903년, 한을 품고 죽었다.

그가 좌천되어 떠나던 날 읊은 시는 유명하다.    

 

東風吹かば 匂おこせよ

梅の花主なしとて春を忘るな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     


미치자네가 좌천하여 규슈의 후쿠오카로 오게 되자 그가 사랑했던 매화가 교토에서 이곳까지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는 전설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텐만구에는 그가 사랑한 매화나무 수천 그루가 심겨 있어 2월이 되면 매화향을 피우기 시작한다.   

   

다자이후 텐만구에 핀 홍매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매화를 사랑한 사람들이 많지만 퇴계 이황(1501-1570)의 매화사랑은 매화 여인 두향이 얽혀있어 로맨틱하면서 슬프다. 퇴계는 부인복이 없었던 것 같다. 30세에 재혼한 부인과 46세 때 사별하였다. 하지만 그가 48세에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그곳에서 관기인 두향(杜香)을 만나게 된다. 두향은 비록 관기였지만 시서(詩書)와 그림, 거문고에 능했고 특히 난과 매화를 잘 길렀다고 한다. 퇴계는 두향과 단양팔경을 유람하며 행복한 시기를 지냈는데, 그 기간은 1년에 불과했다. 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퇴계는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풍기군수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가 단양 땅을 떠날 때 두향이 작별 선물로 매화 화분 하나를 퇴계에게 바쳤다. 퇴계는 두향이 준 매분을 평생 옆에 두고 애지중지 정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저 매분에 물 주어라”

고 당부한 일화는 아직도 후대인의 심금을 울린다. 그는 도산서원에도 매화를 심어 두향을 보듯이 매화 곁을 떠나지 않았고 118편의 <매화시첩>을 남겼다.

아래의 시조는 매화향을 맡으며 외로워하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실려있다.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말라.     


이에 화답하듯 두향의 시도 전해진다.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드니

옛 피던 가지에 피음직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듯말듯 하여라.    

  

퇴계가 나이 70세에 사망하자 이 소식을 들은 두향이 나흘 길을 걸어 안동 땅에 도착했다. 그녀는 퇴계의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서 사흘 동안 정인의 집을 바라보다 단양 강선대에서 투신하여 죽었다.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도 헤어진 이후 서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니 퇴계의 인간적 면모와 절제를 엿볼 수 있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정을 가장한 남자의 마음이 너무 안타깝다. 매화향에 그 안타까운 사랑이 전해질 듯하다.     

 

조선시대 화가 조희룡(1789~1866)은 유독 매화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가 쓴 ‘석우망년록’에

“내게는 매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잘 때는 내가 직접 그린 병풍을 치고 자고, 매화 이름이 들어간 먹을 골라 쓰고 매화 시가 새겨진 벼루를 쓴다”


조희룡의 홍백매화도 사진 by 국립중앙박물관

 

고 적었을 정도다. 조희룡이 바라보다 잠들었던 바로 그 매화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희룡의 매화그림을 한없이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다. 매화 줄기가 용이 솟구치듯 구불거리는 사이에 홍매와 백매가 별처럼 흩어져 피어 있는 그림이었다. 매화 그림으로는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더니 문외한의 내눈에도 너무 멋지게 보여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뛰어난 매화 마니아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몸도 매화가 피어 꽃향기를 날리면 매화를 찾아 이곳저곳 발길을 옮겨본다. 나의 탐매는 기껏해야 아파트에 핀 매화를 쫓는 것에 불과하지만 매화나무 아래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꽃 향기가 바람에 흩날리면 흠흠 향기를 맡아보는즐거움이 결코 작지 않다. 그 향기 속에는 매화를 사랑한 옛사람들의 정취도 서려있다.



홍매의 요염한 모습


청매의 청아한 모습


백매의 온화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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