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할 결심
대학원생은 어떤 신분인가.
학생보다는 직장인의 위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공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실적을 내야 하고, 지도교수에게 내가 유능한 지도제자임을 어필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부 졸업 직후 입학한 대학원생이라면 여전히 '학생'이라는 마인드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졸업 직후 대학원에 입학했고, 사회과학계열 특성상 물리적인 연구실 공간이 없이 생활하다보니 학생이라는 마인드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맡겨진 업무를 처리할 때는 스스로를 일종의 직장인이라고 세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대학원은 나의 일, 교수님의 일, 그외 공부와 페이퍼 작성 등등 본인의 재량에 따라 시간을 턱없이 부족하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 따위는 가뿐하게 무너뜨리는.
이 말인 즉슨 대학원을 다니며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직장인이 시험을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또는 더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를 포기하면 괜찮다. 아예 놓아버릴 수는 없겠지만, 우선순위를 정한 후 중요한 것에 힘을 싣는 방법이다. 그러나 석사 3학기에는 졸업 논문 입문을 위한 프로포절이 기다리고 있다. 코스웍도 병행해야 한다. 우리 학과의 코스웍은 꽤나 중요해서, 매 수업마다 프로포절을 거치는데 이를 위해 들여야 하는 품도 만만치 않다.
정신없이 1학기와 2학기를 보내고 맞이한 방학. 1월과 2월의 목표는 제법 확고했다. 석사논문 초고 작성과 토플 시험 준비. 그런데 2월 초입에 리트 준비를 본격적으로 결정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엑셀을 사용해 치밀하고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볼수록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세 덩이의 일들이 모두 많은 시간들을 요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것도 제대로 끝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2월 한 주 동안만 해도 벌써 계획을 열 번도 넘게 수정했고, 수정한 계획대로 움직이다가도 한계를 느꼈다. 문제는 역시 마음의 짐이었다. 3가지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완수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미리미리 준비해두어야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사실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매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작된 3학기. 3월과 4월에는 5월 초에 있을 석사논문 프로포절 준비를 위해 논문을 읽고, 또 읽고, 내가 쓸 논문의 개요를 짜고, 다듬고, 또 다듬고, 마음에 들지 않아 엎고, 인용할 문장을 고르고, 패러프레이징하고, 번역하고, 글의 흐름이 이상한 것 같아 다듬고, 구성을 바꾸고, 항시 괴로워하고, 실험 설계가 잘 되지 않아 막막해하고, 또 괴로워하다가 쓰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다가 쓰고..의 연속이었다. 중간중간 수업도 들었고, 학회도 갔다가 프로젝트 원고도 쓰고 했다.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병행해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나 막상 마주한 것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었다:-(. 이 사이에는 수면 사이클도 완전히 망가지고, 하루의 패턴 자체가 무너져 굉장히 규칙적으로 불규칙한 생활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금 느꼈다. 이 생활은 나와 맞지 않는구나. 나는 또다시 자기 파괴적으로 살고 있구나.
어찌저찌 프로포절을 잘 마무리하고, 코스웍도 마무리해갈 때쯤 리트 공부를 다시 손에 쥐었다. 이 시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사설 모의고사를 보러 갔다가 점수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그렇게까지 받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일주일 중 3일 정도는 오전에 언어이해를 풀고, 오후에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다가 저녁 때 추리논증을 풀었다. 마감 기한이 닥쳐오면 일주일 정도는 리트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3학기가 끝나 또다시 방학이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 매일 아침 7시 반 정도에 가서 자리를 맡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맡고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적도 있지만, 그래도 가능한 9시 전에는 착석해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훈련했다. 시립도서관의 노트북 열람실에 앉으면 굉장히 전망이 좋다. 자리가 열 몇 개 남짓에 불과해서, 조금 늦게 오면 대기를 해야 한다. 이 점 덕분에 그래도 꾸준히 일찍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갖가지 소음을 내는 분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 노트북 작업을 하는 분들 등등. 본관과 열람실관을 연결하는 통로에 노트북 열람실이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종종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거나 아이들이 뛰어 지나가기도 했다. 에어컨의 적정한 소음과 다양한 소리들이 나는 환경에서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훈련 아닌 훈련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원영적 사고일까?
어느 날은 한 세트를 풀고 한 세트의 모든 문제를 꼼꼼히 분석했지만, 어느 날은 문제만 풀고 분석을 건너 뛰었던 날도 있었다. 추리 한 세트 분석을 끝내면 언어 분석은 손도 못댄 날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 관리를 놓지 않기 위해 시간에 맞춰 푸는 연습은 그래도 꾸역꾸역 했다. 6월 말에서 7월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17년도 추리를 풀고 생각보다 너무 많이 틀리는 바람에 슬럼프가 왔었다. 슬럼프라고 하기에는 리트를 준비한 기간이 짧기는 하지만, 31개 정도를 맞추다가 갑자기 내려간 성적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격일로 가던 운동도 쉬었고, 계속 침대에 누워 허송세월을 보냈다. 하루 이틀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은 오전에 운동을 다녀왔다.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넘어져서 무릎에 멍이 들었지만 레깅스를 신은 덕분에 까지지는 않았고, 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걸어오니 왜인지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남은 기간에는 틀린 부분들을 잘 채워넣어야지. 지금 구멍들을 메워놓으면 시험날에는 제법 그럴 듯한 갑옷을 입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워져 있겠지만, 뚫리지만 않으면 그만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
어느덧 어영부영 7월이 되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것들에 기대어 조금 더 나아가야겠다. 모의고사를 친 날마다 땀을 흘리며 가는 카페에서 먹는 커피, 그리고 맛있는 파이. 푸르른 수원 화성 근처를 거닐며 맞는 뜨거운 햇빛. 헬스장에 불성실하게 출석할 때마다 마주하는 익숙한 얼굴들. 성실하게 출석하는 도서관에서 거의 매일 마주치는 어른들. 무력해질 때면 엄마에게 못이기는 척 끌려 나가 먹는 점심. 5시가 되면 휴게실에서 간식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들. 친구들과 함께 하는 구미. 대학원 동기 언니와 하는 아침인증 스터디. 조심스레 물어볼 때마다 조언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고마운 녀석들. 매일 쓰려 노력하는 일기, 그리고 운동.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는 시간들. 주말마다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또 때로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시간들. 홀로 글을 쓰며 보내는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