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빙자한 이것저것에 대한 소고
오늘은 법학적성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온 날이다.
수원의 삼일공업고등학교에서 제5회 메가로스쿨 모의고사를 치르고서 역대급으로 시험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탈력감을 느꼈다. 언어이해는 7지문밖에 풀이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몇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 검토하겠노라 하고 넘어갔으나 시간에 쫓겨 보지 못했다. 추리논증은 앞페이지를 넘기고 뒷페이지부터 풀었는데, 빨간펜으로 풀다가 눈에서 글자가 자꾸 튕기는 바람에 검은펜으로 바꾸어서 풀었다. 법규정 문제 중 계산을 요하는 문제를 나중에 풀기 위해 논증 파트로 넘어갔는데 한 문제당 소요되는 시간이 자꾸 지체되면서 예상 운영 시간에서 크게 벗어났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흐려졌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만 여럿 보였다. 5분 정도 남기고 다시 앞으로 돌아와 풀지 못했던 두 문제를 풀다가 마킹도 제대로 하지 못할 뻔 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패착 요인들을 생각해보다가 이것들이 다 핑곗거리에 불과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도 좀 지으면서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늘 땀을 흘리며 걸었던 거리에 오늘은 비가 오고 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거리를 걸으며 이대로 집에 갈까, 좋아하던 카페에 가서 라임파이를 포장해서 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새로운 카페를 가야 겠다 마음 먹었다. 시험을 망친 건 망친 거고,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멍도 좀 때리고 싶었다.
평소 조도가 낮은 어둑한 분위기의 카페보다는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카페를 더 선호하지만, 오늘의 기분에는 이곳이 잘 맞는 것 같다. 잔잔하고 약간 글루미한 감성의 노래들도 이 공간과 잘 어울린다. gloomy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라서 검색을 해보았는데, 글루미족이라는 용어도 있다더라.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용어인 듯 하다. 고독한 시간, 혼자 낯선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을 선호하고 즐기는 사람들을 통칭하기 위해 붙였던 용어. 여러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현상이 드러날 때면 사회는 이들을 묶어 부르기 위한 언어를 찾아낸다. 세대 담론이 대표적일 테다. 그렇게 붙은 언어는 개인을 집단으로 분류하는 대신 특별한 인격을 가리는 성질이 있어 나는 그리 불리우는 것, 부르는 것에 대해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언어의 편리성도 인정한다. 특히 정책결정자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발굴해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 특정한 성격을 공유하는 집단이란 타겟으로 삼기에 참 매력적인 존재가 되니 말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는 더더욱 개인들의 개별적인 속성보다는 이렇게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특성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 유리하다.
거시적인 연구에 더 관심이 있었을 때는, 이런 접근법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붙는 기표에 대해 막연한 불편감을 느끼는 정도에 그쳤던 듯 하다. 하지만 좀 더 공부를 하다보니, 내가 하는 공부와 내가 하는 연구가 잡아내지 못하는 현실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의 난제이기도 하다. 더 큰 사회의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개인들을 추상화하고 수치화할수록 사회를 살아가는 진짜 사람들은 투명해지게 되는 현상. 결국 내가 연구를 통해 내놓는 결과물이 속이 비어버린 강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생각들 끝에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리트를 준비하고 있지만, 이 길에 대해서도 나름의 고민들이 많다. 시험 준비에 몰두할 때는 이런 생각들을 놓치기 쉬워 남겨놓는 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