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이어지는 사랑의 맛
"이번에 담근 된장 말이야, 엄청 잘됐어~ 지난번보다 맛이 더 좋아. 할머니도 맛있게 잘 됐대. 이번에 오면 꼭 가져가, 알았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현의 목소리는 한층 들떠 탱글 했다.
현은 몇 해 전부터 직접 장을 담근다. 원래 장은 현의 엄마이자 나의 외할마니 '쑥'의 몫이었다. 온 가족이 쑥의 맛깔스러운 장 맛을 사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쑥이 장 담그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쑥이 장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했던 일들을 기억한다.
"씽아~ 냄새가 좀 고약하지? 요 메주를 이렇게 며칠 잘 말려야 맛있는 장이 되는 거야"
수많은 메주를 거실 이곳저곳에 말리던 쑥이 말했다. 그런데 난 그 고릿한 냄새가 싫지 않았다. 이 투박한 메주라는 것이 된장, 간장, 고추장이라는 훌륭한 친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조상들의 지혜, 쑥의 솜씨에 놀라워 감탄할 뿐이었다.
정교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장맛이란 말해 무엇하나. 시중에 사 먹는 맛과는 비교 불가다. 소금의 그냥 짠맛이라기보다 무게감 있는 간에 부드러우면서도 구수한 그 맛이 다르다. 정말로 다르다. 쑥은 부지런히 매년 장을 새로 만드는데도 어쩜 그렇게 맛이 변하질 않는지 맛볼 때마다 신기했다. 그러면서 쑥의 된장찌개를 생각해 본다. 그녀는 뭐든 많이 끓이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작은 뚝배기에 호박과 양파 두부를 넣어 단정하게 끓여낸다. 작은 뚝배기에 넘칠 듯 넘치지 않게 보글보글 끓여주는 된장의 냄새부터가 참 기가 막힌다. 된장과 송송 썰어 넣은 고추가 곁들여진 빡빡한 된장찌개는 쑥의 필살기였다. 어릴 적 쑥이 담가준 새빨간 깍두기에 밥 비벼 먹는 것과 함께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 먹는 것. 그 모든 게 추억이고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쑥의 된장과 된장찌개를 못 먹은 지가 벌써 몇 해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쑥은 이전의 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의 일을, 당장의 일까지도 기억 못 했고 희미한 하루들을 정처 없이 헤맸다. 그녀는 된장을 만드는 법도 우리만의 작은 기억과 추억도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 곁에서 쑥을 살뜰히 지켜본 현은 쑥이 했던 일들을 차곡차곡 그리고 묵묵히 이어나가고자 했다. 그중 하나가 장 담그기였다.
"씽아~ 엄마 이번에 된장 한번 담가보려고. 할머니한테도 물어보고 인터넷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할만하더라?"
그렇게 몇 년 전 현은 갑자기 장을 담근 댔다. 왠지 모를 자신감과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시작된 현의 장 담그기. "요새는 메주를 팔더라? 그래서 사봤어. 엄청 편해~ 할머니처럼 안 만들어도 돼~" 쑥이 알려준 방법에 현 스스로 알아내고 공부한 방식을 더해 그만의 똑 부러진 장이 완성되었다. 현의 장은 묘하게 쑥의 맛과는 달랐지만 그 맛 또한 좋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녀의 장 맛은 깊어진다. 실력에 가속도가 붙은듯하다. 그런 그녀의 장을 맛보면 괜히 여러 감정이 교차해 마음이 복잡하다. 쑥의 맛있는 정성을 고스란히 이어가고자 하는 현의 마음이 깊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야, 나도 나이가 더 들면 우리 할머니, 엄마처럼 장을 담그거나 김장 같은 걸 하게 될까?"
"글쎄, 음.. 자긴 왠지 할 거 같은데? 워낙에 할머니, 어머님 장이나 김치 좋아하잖아. 내가 도와줄게. 같이하자!"
남편의 말에 웃으며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쑥과 현의 손맛을 안 이상 일단 도전은 해볼 것 같은 마음을 간파당했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현의 장 맛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에효~너네 온다고 식혜 해봤는데 뭔가 시큼하네. 으으~~ 아까워~ 버려야겠어.
지난번이랑 다른 레시피 찾아보고 했는데 뭘 잘못한 거지?
할머니한테 직접 배워둘걸 그랬어..."
쑥의 식혜 맛 또한 끝내주는 걸 아는 현은 오늘도 쑥의 맛에 도전했다. 뜻대로 되지 않아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현이다.
"번거롭게 뭘~ 그냥 사 먹지."
무심히 현에게 위로를 건넨다.
"사 먹는 맛이랑 다르지~"
뒤돌아서 주방을 정리하는 현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나중에 된장을 담그고 김장을 담그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나도 쑥과 현처럼 잘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힘껏 벅찼다가 이내 풀썩 주저앉아 슬퍼졌다. 연로한 쑥과 현의 모습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뭣도 모르게 멀리 상상하는 버릇은 또 이렇게 눈물로 귀결되는구나. 현이 볼세라 얼른 속을 달래며 눈물을 훔친다.
"그래도 이번이 두 번째 실패니까 다음번엔 성공할 수 있겠지?"
현이 반짝이며 얘기한다. 그녀는 나와 다른 상상을 한 모양이다. 다음 세 번째를 기약하는 다짐이 생글 웃음을 안겨준다. 그러면서 머나먼 슬픈 생각은 접어두고 즐겁게 지금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운을 떼 본다.
"엄마, 나 어제 육개장 끓였거든? 엄마 맛이 나서 놀랐어~ 완전 엄마가 끓인 거 같아. 나 요리에 좀 소질이 있나? 크크크큭, 식이랑 찰랑이도 밥을 두 그릇씩 먹더라니까?"
현이 쑥의 솜씨를 닮아가듯 나 또한 현의 솜씨를 이어가는 중임을 알렸다. 현의 필살기인 육개장은 누구도 탐낼 어마어마한 맛이다. 벌써 다섯 번 넘게 도전해 봤는데 점점 현의 맛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신이 난다.
"오~ 그래? 다음번에 엄마도 맛 좀 보여줘 봐~"
"웅~알았어, 한솥 끓여 올게~"
현과 다음을 기대하며 우리는 웃음을 머금는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상상으로 다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둥실둥실 서로의 상상에 응원과 기대를 담아 보낸다. 그렇게 서로의 음식을 맛보며 추억을 쌓아 갈 것이다.
오래도록, 대대로의 사랑은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