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나는 심연에서 조금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2025년 11월 27일 문장밥
어젯밤, 퇴근길 지하철역에 내려서 올라가려는데 툭, 소리가 났습니다. 뭐지? 하고 주변을 돌아보다 한 발짝 걷고 발에 무언가 치여 보니 회색 양모 실로 짜인 니트 장갑이었습니다.
누가 떨어트린 거지? 하고 앞을 보니 이미 멀찌감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 스무 명 남짓이 보였습니다. 소리를 질러 모두에게 장갑 떨어뜨리셨어요~~! 를 외칠까 하다가 어떡하지를 외치며 일단 찝찝한 맘으로 계단을 올랐어요. 그러다 긴 계단이 끝날 때쯤 또 한쪽의 회색 장갑이 떨어져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일단 웃음부터 나왔습니다. 아니, 헨젤과 그레텔인가?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가시네. 하고 웃으며 앞을 보니 개찰구로 저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나가있었어요. 결국 뒤로 돌아 다시 탑승구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한쪽을 마저 주워 쌍을 만든 뒤 2분 정도 기다렸어요. 출구에 나가 잃어버린 장갑을 깨닫고 뛰어내려오는 분이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날씨가 춥지 않은 저녁이라 그랬는지, 장갑은 잊혔나 봅니다. 주운 장갑을 직원 사무실에 드리고 나와 집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퇴근길과 사랑하는 동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침대로 돌아와 고민과 상상의 우주로 접속했습니다. 책방의 이사와 지금 일하는 곳에서의 과로와 스트레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여러 가지 일들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요. 밤부터 아침까지요. 많은 단어들이 끝없이 떠오르고, 답 없는 질문만 계속 이어집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조용히 걸으며 지하철에 장갑을 헨젤과 그레텔처럼 떨어뜨리고 간 어떤 승객처럼요.
잠들지 못하는 밤에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함께 글방에서 쓰고 있는 글친구 시원님에게 선물 받은 책,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입니다.
아껴둔 새로운 챕터를 읽다가 이전에 읽은 앞부분으로 건너뛰어 다시 헤엄치듯 종이를 앞뒤로 넘나들며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전에 읽을 땐 주목하지 못했던 문장을 만났죠.
언어는
내가 항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 모든 언어로 나는
심연에서 조금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장으로
내 초점은 예리해졌다.
이 모든 이야기로
나는 안에서부터 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계속 나의 단어를 찾고, 써나가야 하는 이유를 또 만납니다. 쓰고 또 쓰면서 꺼내어 흘려보내기도 하고, 담을 건 모아두고 하다 보면 또 오롯한 하루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