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네요.
시원님,
편지는 늦은 새벽에 받으면 또 그런 맛이 있잖아요. 너무 괜찮아요.
글을 쓰려고 하는데 옆에서 고양이 망고가 은빛 털뭉치를 저에게 비비적대며 왜에에에에에에옹 하면서 계속 울어대고 있네요. '나를 만져라!' 요구하는 바람에 몇 자 쓰고 또 궁디팡팡 해주다 보니 좀처럼 키보드를 계속 타닥거릴 수 없는 '어쩔 수가 없다'의 상황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의 나는 어떤 것들이 가득 차 있을까?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궁금해지게 되는 일요일 아침입니다. 시원님의 '덕분에' 글을 다시 읽으며 생각하게 되어요. 목정원 작가의 「모국어는 침묵이다」에서 인용해 주신 문장, 저도 정말 감탄하며 읽었던 문장인데요.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 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처음 읽을 땐 문장 전체에, 그리고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에 꽂혔다면 이번에 읽을 때에는 주어인 '나를 이루는 것'에 꽂혔어요. 지금 시원 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잠시 글을 쓰다가 점심을 먹고 산책 겸 집 근처 핸드드립을 주로 하는 카페에 와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이어서 글을 쓰고 있어요. 1년에 한두 번 정도 스페셜티 커피를 마셔요. '경'과 같이 커피를 그리워하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을 수 있다는 아야기를 자꾸 커피 업계 분들께 듣곤 해요. 마실 수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맛과 향이 풍부한 커피를 온몸을 사용해 음미하고 마셔두자 생각합니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저는 어떤가 생각해 봤거든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책방, 아쳅토, 집, 사랑, 이야기, 친구, 시간과 꿈, 돈과 책임 이런 단어들이 들어차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추가된 단어가요. 요새 '도전'이라는 단어를 하나 더 품게 된 것 같아요. 고민하던 풀타임 아르바이트 일을 그만둬야겠다 결심하고 고지한 바로 다음날 오랜 동료 분에게서 일을 하나 제안받았거든요. 이전에 회사 생활을 할 때 맡았던 일과 같은 일이에요. 마케팅 직무요. 그런데 이제 좀 큰 규모로 일을 해보게 될 것 같아요. 내년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예상이 안 되고, 정말이지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다 싶은 놀라운 기분으로 연말을 맞이하고 있답니다.
동업자가 떠나고 이렇게 갑자기 또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된다는 게 느닷없이, 갑자기 찾아오게 될지 몰랐어요. 100% 확실히 하게 된 건 아니지만,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두려움과 설렘, 상상과 걱정 사이를 오가는 이틀을 보내고 있답니다.
한편으론 돌 자루를 하나 더 스스로 지는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내가 새로운 일까지 하게 되면 계속 문제없이 잘 글을 쓸 수 있을까, 건강하게 아쳅토의 시즌2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정말 괜찮겠어?'라고 계속 묻는 거죠. 그래서 오늘 아침 문장밥도 그렇게 '변덕과 책임'에 관한 메리 올리버의 문장을 가져왔나 봐요. 내가 선택한 길들로 인해 내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지 않게 되기를 더욱 신경 써야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참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은 내 돌무더기들을 기꺼이 알아서 같이 지겠다고 와주는 고마운 이들에겐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르는 척, 정말 미안하지만, 아주 고마운 마음으로 조금은 가끔은 짐을 같이 져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사랑하는 이의 돌을 그가 힘겨워하고 버거워할 때 함께 지어주고 싶거든요. 그래서 더 마음도 몸도 힘을 기르고 싶다 생각합니다.
시원 님이 제 덕분에 글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뻤어요. 사실 요새 저도 그렇거든요. 함께 쓰기 때문에 요란한 일상과 들이닥치는 일 중에도 계속 쓰게 되니까요. 덕분이에요.
우리는 글로 서로의 마음속 돌을 나눠지고 있는 것 같아요.
시원 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