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
지난번 글에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문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실 수 없을 겁니다. 제 경우 이걸 알고 나서야 비로소 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문의 원리를 얘기하기 전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교과서의 구성을 한 번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교과서의 구성에 ‘학문의 원리’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알기 쉽게 수학 교과서를 가지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교과서를 들춰보면 항상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의'이죠. 맨 처음 배우는 자연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우리는 숫자를 세기 위해 1, 2, 3, 4 순으로 센다. 이들은 자연수라고 하고, 자연수는 0보다 큰 양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약속을 한 다음 사칙연산, 더 큰 숫자를 세는 방법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학문의 원리가 무엇인지 짐작했을 겁니다. 바로 정의를 먼저 세운 다음에, 내용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말한 자연수의 정의에 따라 [1, 2, 3, 4]를 자연수라 하며 다른 숫자들 [0, -1, 3.14, 1/2] 등을 자연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딴지를 걸어보겠습니다. [0, -1, 3.14, 1/2] 등의 숫자들을 자연수라고 제가 우기면 여러분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계속 이 숫자들은 자연수라고 우깁니다.
그러면 2가지 반응이 나올 겁니다. 아예 저를 무시하거나 ‘저 숫자들을 자연수라고 정의를 다시 내릴 필요가 있다고 고려하던가’입니다. 하지만 후자일 경우는 세상이 뒤집혀 다시 자연수라는 정의를 다시 약속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세운 정의는 일종의 약속, 전제, 혹은 암묵적 규율이기 때문에 어딜 가든 어느 누구나 쉽게 동의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암묵적 규율 하에 학문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만일 어떤 학문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를 대체하기 위해 암묵적 규율을 다시 체크하고 새로운 정의를 세우는 작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 테크닉이라고 과연 다를까요?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피아노 테크닉에 대해서 통용이 되는 정의, 암묵적인 규율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어느 누구든 동의하는 정의들을 한 번 얘기해 보지요.
1) 손가락과 팔근육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합니다. 아니, 인체 해부학을 찾아보면 바로 알 수 있죠.
2) 건반을 타건 할 때 팔무게를 온전히 건반에 보내야 한다.
: 건반 바닥에 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피아노가 지닌 음색을 낼 수 있겠지요.
3) 몸이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
: 몸이 긴장된 상태라면 피아노를 치는 데에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4) 손가락과 연결된 팔근육은 힘이 풀어져 있어야 한다.
: 어느 곳이든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팔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이 풀어진 상태여야 합니다.
5) 한 음을 제대로 낼 줄 알아야 한다.
: 한 개의 음을 제대로 낼 수 있다면 그다음 음을 칠 때 제대로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외에 좀 더 다양한 전제가 있을 것입니다만,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이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전제들은 피아노를 치기 전, 혹은 피아노를 칠 때의 이야기들로만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아노를 치고 난 제자리로 돌아올 때의 전제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손끝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따라옵니다. 지난번에 손끝이 단단한 것, 부드러운 것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 2가지가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전제가 각각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1) 손끝이 단단해야 하는 경우의 적용되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 바로 손끝이 피아노 건반 바닥을 ‘딛고!’ 원위치로 올라온다 것입니다.
2) 반대로 손끝이 부드러워야 하는 경우의 적용되는 전제는 무엇일까요?
: 바로 건반바닥을 힘으로 딛는 것이 아닌, 피아노 건반이 언제든 손끝을 떼면! 자연스럽고도 가볍게 원위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손가락으로 쉬폰 케익을 눌렀다가 손가락을 떼면 원위치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적용되는 전제들이 다르기 때문에 손끝, 손가락의 움직임, 팔의 움직임, 팔꿈치의 움직임, 손목의 움직임들이 전부 다 다르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전제가 다르니 완전히 다른 피아노 테크닉 모델이 세워지는 겁니다.
일례로, 손목의 움직임도 똑같습니다. 손목의 업다운은 전제 1)에 기반될 경우 적용 가능하지만, 만일 전제 2)를 기반하여 접근하면 손목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지양되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알렉산더 테크닉의 원리에 기반하여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제에 대해 모른 상태에서 가량 손끝이 단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께 ‘손끝이 부드러워야 한다’고 말하면 도저히 간극이 좁혀지질 않을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 케이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아노 테크닉에 대해서 다르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이 전제들이 과연 나에게 ‘올바른가? 아닌가?’가 아니라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도움이 안 되는가?’로 접근해야 하죠. 만일 도움이 된다고 결론이 났으면, 그다음 한 사람이 세워놓은 모델 안에서 내용의 타당성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전제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은 학문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피아노 테크닉을 얘기하면 항상 따라오는 단어들이 몇 가지 있지요. 그중 가장 혼란스러운 단어인 '릴랙스'에 대해 알렉산더 테크닉의 개념을 적용하여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 줄 압니다. 하지만 이걸 이해하실 때 비로소 전체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p.s.2 가감없는 피드백을 해주실 때, 이 글이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