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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Dec 08. 2016

함께 걷는 법을 잊은 학규형에게, 「밤의 피크닉」

좁은 서재

햄토리가 살 것 같은 작은 원룸에 몸을 욱여넣고 살고 있다. 가전과 가구에 대한 욕심은 일찌감치 버렸음에도 책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한 권 한 권 사 모은 책이 발로 차일 지경에 이르러, 작은 책꽂이를 샀다. 기껏해야 20권 남짓의 책을 꽂을 수 있는 내 서재다.

작다기보다 좁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 서재에는, 내가 정말 아끼는 책들만 꽂혀 있다. 이것저것 다 꽂아 둘 여력이 없어 군더더기 없이 내 취향을 듬뿍 반영한 녀석들만 모았다. 고로 이 서재는 아주 편향되고 편협할지도 모른다.

 




함께 걷는 법을 잊은 학규형에게, <밤의 피크닉>


학규형, 요즘 좀 어떠신가요? 아무래도 만덕산 보다는 아파트가 살기 좋죠? 그러게 진작 나오시지 그랬어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한동안 시끄러웠던 총리직도 물 건너갔고, 요즘 좀 여유 있으시죠? 근래에 언행일치 하는 정치인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힘들었는데, 역시 형은 달라요. 형이 내걸었던 감동적인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계시잖아요.


2년 3개월간 토담 생활하면서 책은 한 권 쓰셔서 다행이에요. 제목이 뭐더라. 아, <강진일기>. 그것마저 안 팔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며칠 전 광화문 교보문고 지나다가 형 생각나서 봤더니 벌써 6쇄나 찍었더라고요. 제가 형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 형 인지도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긴 하지만 꽁꽁 얼은 출판시장에서 그 정도면 선방하신 거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 책이 형 인생에 정치적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타이밍을 날려먹은 걸 보상해줄 순 없을 거예요. 지난 총선 때 토담에서 나와 잠깐 얼굴만 비치셨더라도 민주당의 구세주 혹은 제3 정당의 개국공신으로 길이 남았을 텐데... 어휴,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이미 지난 일이니.


앞으로 저녁뿐만 아니라 아침도, 점심도 넉넉하게 있을 학규 형에게 추천하는 책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에요.


<밤의 피크닉>은 어느 고등학교 행사인 '보행제'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에요. 보행제는 전교생이 24시간 동안 80km를 걷는 행사예요. 몇 번의 휴식과 식사시간, 취침 2시간을 제외하면 걷기만 해요. 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내도록 걷고 또 걸어요.


내내 걷기만 하는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참가하는 학생들 생각은 조금 다른가 봐요. 물론 처음에는 다들 대체 이런 걸 왜 하냐, 다리 아파서 죽을 것 같다며 볼멘소리를 해요. 신나게 떠들며 걷던 학생들도 몇 시간이 지나 발에 물집이 생기고 지치기 시작하면 말을 잃고 묵묵히 걷게 되죠.


걸을 겁니다, 모두와 같이 걸을 겁니다, 하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일어나 또 비틀비틀 걷기 시작하지만, 몇 미터 가지 못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쓰러져버리는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부축받으며 다시 일어섰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보행제는 지쳐 쓰러질 만큼 힘들기도 하지만, 놓치면 아쉬워 눈물 흘릴 만큼 특별하기도 해요.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할 말을 잃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무사히 넘기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밤의 피크닉'이 시작되기 때문이에요.


해가 지고 별이 총총 뜨는 밤이 되면 하나 둘 가슴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해요. 좋아하던 남자에게 고백을 하고, 서운했던 일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오글거려서 할 수 없었던 간질간질한 말도 오고 가고. 아무 계획 없이 보행제에 참여한 학생들도 친구들의 질문 공세를 버티고 버티다 '지쳐서 거짓말할 힘도 없어'지는 순간에 비밀을 털어놓고야 말죠.


분위기 때문인지, 보행제의 암묵적 룰인지 직접 걸어보지 않은 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오나 봐요.


이렇게 밤중에, 낮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온몸이 아파서 녹초가 되었지만 얼굴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에서 이야기를 하며 끄덕이고 있는 것이 나의 보행제구나, 하고.


모두 그 특별함을 알고 있으니, 밤의 피크닉을 놓치지 않으려 해요. 타이밍이기 때문이죠. 꼭꼭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마음 놓고 꺼낼 수 있는 다시는 오지 않을 타이밍이요.


보행제라고 한들, 타이밍이 왔다고 한들, 감추고 감추던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 간질간질한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서?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 덕분에? 오랜 시간 같이 있어서?


글쎄요. 힌트는 아래 주인공의 말에서 찾을 수 있어요.


8백 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목격당한 시체라는 것도 우습군,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행제 중 야밤에 시체를 목격한 주인공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시체가 우습다고 생각해요. 혼자 산길을 걷다 봤으면 기겁하고도 남을 시체가 한순간에 우스운 존재로 전락한 것이죠.


그가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던 건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 무서운 존재를 마주한 건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겁먹지 않았죠. 보행제를 통해 함께 한다는 힘을 경험한 거예요. 그 길을 함께 걷는 동료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었고요.


마음속에 깊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함께 발맞추어 가는 동료라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믿고 의지하게 된 거죠.


물론 그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에요. 지쳐 쓰러질 만큼 힘들어서 낙오자도 속출하죠. 80km나 걸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함께 하기 때문에, 언제나 옆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죠.


나란히 함께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신기하네. 단지 그것뿐인 것이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엄청난 것이었다니.


고등학교 3년 내내 하고 싶었지만 꾹꾹 담아뒀던 말을 고3 마지막 보행제에서 털어놓은 주인공의 소감처럼, 발맞춰 걸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예요. 함께 한다는 것의 위대함을, 혼자서 갈 수 없는 길을 함께한 이의 소중함을요.


게다가 그 경험이 더욱 소중한 건, 우리 삶에서 보행제와 같은 타이밍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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