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예쁘게 있는 것

위로에 관한 와일드한 생각

by ACCIGRAPHY




남편이 거실을 지나가다 글 제목을 보더니 해석해 보겠단다.


"나... I, 하나 a, 예쁘게 beautiful...있는 것? 있다? 있다 is a be-verb so, 'am'...

‘I'M A BEAUTIFUL THING?’"


(온통 찡그림)

"내가 설마 그런 글을 쓰겠어?


"어. 쓸 거 같아."


"알았어. 빨리 자. 잘 자!"


남편을 방으로 비질하듯 쓸어 넣고 안방 문을 꼬옥 닫자 비로소 나의 거실엔 강 같은 평화가 흐른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남편은 위로받는 걸 싫어한다.


자기 위로할 바엔 나 하나라도 그냥 행복하게 있는 게 자기에겐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어릴 적 구루 신드롬과 메시아 컴플렉스를 오가며 내 깜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시절, 남편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남편에게 자꾸만 가까이 다가가다 서로 상처만 내곤 했다.


남편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기가 힘든 날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씩 번잡한 도심을 걷다 오곤 했는데 ‘삑삑삑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남편 얼굴엔 '나 이제 괜찮아'보다 '걸어도 소용없었어'라고 쓰여 있을 때가 많았다.


'당신 하나라도 행복하게 있는 게 위로가 된다.'


수많은 오해와 삐짐을 거치고 나서야 이 문장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나도 남편의 취향에 동화되었다. 바라볼수록 좋은 문장이었고 부부라는 개인들로 존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은 자신이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 내가 공감하느라 나마저 어두워지는 게 죄스러웠던 것이고 내가 환하게 불 켠 존재로 있으면 그 빛에 쉽게 동화되었다. 그렇게 간단했다. 위로할 일이 아니라 그냥 내가 환하게 불만 켜 놓으면 될 일이었다.


같은 위로법을 몇몇 친구들에게 써 보았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가 함께 어두워주길 원했다. 상관없었다. 친밀감과 무관하게 우리 마음의 결은 다 달랐고 이러나저러나 내 친구였다.


지금 시점에 내 주변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남편 위로법이 통하는 친구들이다.

이것에 대해서도 딱히 분별적 생각은 없다. 아직도 나는 인간 마음에 대해 아는 게 없고 그냥 현상만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성장과 생명의 느낌을 주는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갈 뿐이다.


Mosh: 격렬하게 춤을 추다.

네이버는 저렇게 정의하지만 사실 모쉬는 펑크씬에서 의도적으로 서로의 몸을 거칠게 밀치며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는 행위다.


모쉬적 청취를 좋아하는 부류는 보통 모쉬핏(mosh pit, 장르에 따라 vip석이라는 의미도)에 모여있고 적절한 모쉬는 현장 분위기를 아름답게 한다. 가끔 적절선을 모르는 이들의 모쉬에 의해 싸움이 일어나거나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하는데 그 '적절히 아름다운 모쉬'에 대한 선을 씬에 익숙한 사람들은 귀신같이 안다.


브런치에서도 모쉬하는 분들을 본다. 때로는 맑고 때론 어둡다. 나도 가끔 하는데 내가 다가가서 치대는 사람들에겐 나도 모르게 타이틀을 빼고 버릇없이 작가명만 부르거나 반대로 '선생님' 하기도 한다. 나는 누군가 마음에 들면 버릇없이 장난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기 때문에 이걸 경계하기 위해 ‘선생님’을 꺼내들었나 싶기도 하다.


최근에 좋아하는 작가님 글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었다. ‘어디 아픈가. 집에 우환이 있나...’ 내적 동동거림이 발생한 나는 길고양이처럼 슬며시 다가가 헤드번팅을 해 보았고, 다행히 나의 마음은 잘 전달되었다.


나는 그 작가님의 브런치 모쉬를 좋아한다. 글투는 거칠지만 몰래 홍익인간적 마음씨를 지닌 그의 글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게 왜 내게 위로였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브런치에서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잘 없어서였을 것이다. 위로에 대한 취향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준다.




바닷가에서 놀면서 사람들에게 낙서를 해 주었다. 홍익인간적 인간을 좋아한다. project hongikingans, los angele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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