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일을 좋아한다. 태어난 게 좋기 때문이다. 왠지 다섯 살짜리가 할 말 같지만 진심이다.
어제 친구네에서 미리 파티를 하고 늦게 잠이 든 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커피를 내렸다. 비몽사몽 뒷마당으로 커피를 들고나가 홀짝대면서 태양을 향해 아직 잠든 눈을 미세하게 개방해 본다. 놀래서 급히 다시 닫고는 눈두덩이로 햇살을 느끼자니 그중 한 줄기가 참지 못하고 수정체를 파고들며 소리친다.
'생일이니까 그거 해봐! 니가 태어난 해부터 지금까지 기억하기 게임! 너무 길게 말고 일 년당 한 줄? 재밌겠지!?' 나는 얼른 '어! 재밌겠다!' 맞장구를 치고는 거실로 들어와 기억과 들은 바가 혼재된 연혁을 써 내려간다. 아침 햇살은 내게 이것저것 시키는 게 많다.
1983
아파트 계단. 누군가 나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등이 조그만 것을 보니 엄마는 아니고 언니다.
1984
작은방에 앉아 현관문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반질반질한 장판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한 일본계 미국인이 아프리카에서 내 남편을 낳았다.
1985
신나게 잘 타고 다니던 빨간 자동차를 버렸다. 왠지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느껴진다. 땡땡이 무늬 담요에서 엄마 냄새가 나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1986
공중목욕탕에서 고개를 처들지 않고 (고개 들고 찾으면 미끄러짐) 내 눈높이에서 엄마를 찾으려면 왼쪽 바깥 허벅지에 바나나킥모양 큰 점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뜨거운 엄마의 때밀이를 견뎌내고 냉장고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꽂아 쪽쪽 넘기며 화형 당한 내 몸을 달랜다.
1987
엄마 손을 잡고 비 내린 아스팔트를 걷는다. 땅바닥에 부서진 빛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으로는 엄마의 온기를 느낀다.
안전하다. 살아있다.
1988
로보트 태권브이 봐야 되는데 테레비에선 올림픽이 열렸다.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
1989
고르바쵸프라는 사람 머리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 하루종일 웃었다.
1990
내일부터는 학교에 가야 하니 땡땡이 무늬 담요를 끊어야 한다. 마음속으로 깊은 다짐을 한다. '나는 이 담요 없어도 괜찮아. 이 냄새는 이제부터 마음으로만 맡는 거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마.'
1991
내 친구 이하나의 가방을 들어주고 싶어서 하굣길에 가방 두 개를 메고 집에 왔다. 우리 집에 먼저 도착하여 하나에게 빠이빠이를 하며 가방을 건네주다 두 개 들고 있는 모습을 엄마에게 들켰다. 엄마는 내게 그건 하나에게도 나에게도 나쁜 짓이라고 하셨다.
1992
새로 전학 간 학교 친구들이 귀엽다. 선생님들도 따뜻하다. 내가 1학년때부터 2학년 때 선생님들은 좀 차갑거나 이상했는데 다행이었다.
1993
마칭밴드 경연대회가 있다. 나는 퍼커션이 하고 싶어서 손을 들었는데 반 친구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5학년 선배들이 우리를 불러 모았다. "이거 한번 듣고 그대로 칠 수 있는 사람이 퍼커션 할 거야! 잘 들어! 두구두구두구두구 따따 두구 따따 따따 다라다라다라다라 딴 다라다라다라다라다라 딴딴딴!"
1994
엄선자 선생님이 방과 후에 나를 앉혀놓고 글짓기를 가르쳐 주셨다. 아이들이 보는 학습월간지 마지막 장에 내 동시가 실렸다. 자꾸자꾸 칭찬해 주시는 엄선자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아무래도 커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5
우정숙 선생님이 아침 조회시간에 노래를 시키셨다. 빼는 법이 잘 없는 나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커서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96
김정수 선생님이 나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셨다. 서예는 글씨 예쁘게 쓰는 게 아니라 붓이 가야 할 길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붓이 가야 할 길을 이해하면 모양은 나오게 되어있다고 하셨다. 우리 김정수 선생님은 나에게 글씨 말고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운필 하듯 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커서 서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