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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헤어지자

적당한 짐

by ACCIGRAPHY





여름이라 열흘에 한번 꼴로 이불 빨래를 한다.


잘 빨려진 하얀 커버 위에 몸을 던져 얇은 시트를 '팡-' 펼쳐 덮는 순간, 봉긋하게 서서히 낙하하는 시트는 미세한 공기압을 다리에 가하며 다정한 중력의 법문을 펼친다.


요세미티에서 언젠가 봤던 낙석 장면과는 반대편에 있는 중력의 결. 가차 없이 강력한 무언가가 연약한 물체는 또 이리 나긋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기쁨이 흐른다.


이윽고 피부에 안착한 시트를 몸서리치게 반기다 긴 숨을 내쉬는 것으로 이불 덮기는 마무리된다. 그리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시선을 돌려 거실에 있을 남편을 그리워한다.




여름밤은 남편과 헤어지는 시즌이다.


그는 거실의 시원한 공기를 좋아하고 나는 찬바람을 싫어하기에 자연스레 헤어지는 것이다. 내가 찬바람을 좋아할 때는 선풍기가 라면 불어줄 때 정도. 선풍기가 불어주는 라면으로 수많은 여름이 행복했다.


둘 다 서로를 버렸지만 버림받았다 생각하지 않고 숙면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는 류의 인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잘 때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전생에 굿나잇 하고 헤어진 남편이 아침에 무사히 거실에 도착해 있는 모습을 보면 참 반갑다.


이리 반가우려고 서로 버리는 것도 있다.

사랑하지만 짐스러우면 잠깐 버린다.

매일 내게 적당한 짐만 지기로 했거든.


내가 지고 싶은 짐들이 바르게 살려는 욕심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후로 짐 체크를 수시로 한다.




내일은 오랜만에 돈 벌러 가는 날.


무대가 아닌 리셉션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할 계획인데 주최 측에서 계획에 없던 요구를 갑자기 해 온다.


옛날 같았으면 그 짐도 내가 져 주는 것이 '좋은 일' 같아 해 줬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 여행하던 어느 날 문득

'좋은 삶'이라고 쓰여 있는 내 짐꾸리미를 풀어헤쳐보고 대부분의 것들을 길바닥에 버렸다. 내 인생에 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훌륭한 나 말고, 변하는 나 말고, 비교 대상이 사라져 버린 나를 처음으로 만났다.




허니듀멜론을 사 먹고 씨를 백개정도 심어봤는데 그중 하나가 싹을 틔우더니 이렇게 컸다. 히힣ㅎ 이것 말고도 큰 거 한 개 더 달렸음!